거대한 벽 앞에서

서퍼들은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가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실력을 향상하는 스텝업을 할 때 물리적, 심리적, 정신적인 죽음의 상황까지 가게 된다. 다 포기하고 싶은 상황 말이다. 이를 극복하고 한계를 뛰어넘으면 성장하지만,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막힌 길에서 좌절하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절망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오늘 나눌 말씀 때문이다.

성경에는 극심한 절망, 희망과 소망이 사라진 좌절과 낙망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쩌면 잘 걸어가던 길이 사라졌거나 장벽에 막힌 상황이다. 막다른 길 사방이 막힌 길을 그리스어로 ‘아포리아’라고 한다.

아/포리아, 길이라는 그리스어 ‘포리아’에 부정사 ‘아’가 붙으면서 만들어진 단어 아포리아, 그러한 상황에 몰리면 포기해 버리고 희망의 끈을 놓는다. 아는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막히게 된 것이다. 막히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포기한다.

그런 포기하는 쪽을 선택한 이들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쉬워 보였는데 막상 해보고 나니 생각한 그것과는 너무 다르다. 또는 충분한 경험이 없거나 한 번도 그렇게 심각한 난관에 부딪혀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다 아는 줄 알았고 어쩌면 아는 척을 해왔지만 길이 막히니 뚫고 나아갈 힘도 지혜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경에는 이러한 아포리아 상태에 빠진 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골리앗과 블레셋 대군 앞에 선 이스라엘과 사울. 사무엘상 17장에서는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왔다”라고 기록한다.

또 홍해 앞에 선 모세와 백성들은 물벽과 군대를 이룬 사람의 벽. 이웃 나라들의 공격에 승리를 경험한 백성들은 다시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의 관성에 따라서 늘 제 갈 길로 습관대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내면 죄성의 벽은 그 어떤 벽보다도 두껍다.

어디 구약만 그런가. 신약에는 제자들이 있다. 3년간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선생님이며 새로운 왕이신 주님, 그들의 모든 것이었던 주님을 잃었을 때는 자신들의 목숨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들이 병사들과 함께 체포영장을 가져올까 봐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벌벌 떨고 있었다. 이렇게 신구약 전반에 걸쳐 성경에는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려운 시기에는 균형을 잃고, 희망을 완전히 잃기도 한다. 용기 있게 도전하거나 평정심을 갖는 이들은 극소수이고 희망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둠 속에 빠져들기 쉽다. 아포리아, 지나친 압박에 우울과 불안함에 빠진다.

요한복음 20장 19절에선 제자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다.”라는 기록을 보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유대 지도자들도 공권력도 로마의 군인들도 다 무서운 것이다. 공의회와 로마 권력을 통해 주님을 잡아갔고 자신도 잡아가기 위해 논의 중이라는 말도 주님의 무덤이 열려있다는 이야기도 두려움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이 믿어진다. 성경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빛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희망의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다. 마치 배가 닻을 내리고 떠내려가지 않는 것과 같이 흔들림이 없다.

시냇가에 심어져서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가 계절을 따라서 열매를 맺기 위해 준비를 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서서히 깊어 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성숙해 가는 과정보다 결과에만 집착한다. 사실상 결과는 과정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단편일 뿐 지나온 과정이 모든 것인데 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보다 높으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은 세상의 길보다 낫다.” 말씀하신다. 하나님께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관심이 있다. 삶의 구석구석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우리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 기대어 사는 일상의 반복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하게 된다. 이 믿음이 회복될 때 소망도 회복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회복할 수 있다. 잃어버린 일상과 신앙이 균형을 되찾는 것이다.


골리앗 앞에선 다윗 이야기를 조금 깊이 생각해 본다. 골리앗 앞에 서기 전에 많은 시간 연습하며 연마하고 곰과 사자 앞에 섰다. 300번 물매를 던졌을까? 3000번도 던졌을 그의 손은 갈라지고 터지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 몇 번 던졌는지 기억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양을 잃은 기억이 큰 무게로 충격으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다.

그렇게 성경 속 이야기의 자간과 행간 그리고 문단 간 보이지 않는 그의 숨 막히는 절망과 간구의 시간들을 묵상하며 다윗과 함께 긴긴밤을 보낸다. 곰과 사자와의 사건들, 수없는 반복을 보냈으니 우리도 깊이 느끼게 된다. 오늘 우리의 삶도 같으니 말이다.

서퍼들은 파도를 타다가 넘어지면 넘어진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돌아가 살펴본다. 필자가 그랬다. 주변에 정확하게 문제를 보고 뚫고 나아갈 방법을 아는 이들에게 물어본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들여다보고 작은 실수로 넘어졌다면 왜 넘어졌는지 살펴본다.

바위가 있었는지, 물결이 바뀌는 구간이었는지, 그날의 바람 컨디션을 어땠는지 구석구석 들여다본다. 그리고 균형을 잃고 두려움에 빠졌던 그때를 살펴본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 마치 사자의 턱을 치고 양을 구하기 위해 용기와 함께 실력이 필요했던 다윗과 같다. 그리고 인명 구조를 나설 때 똑같은 방법을 적용한다.

우리가 살펴본 흔들리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은 믿음이 없는 상태이다. 제자들과 같이 절망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동안 그 어떤 노력도 의미가 없다. 두 번째는 충분히 연습 되지 않은 미성숙의 문제다. 하나님을 중심에 둔 구원받은 성도라면 하나님을 모시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는 다윗과 같은 실력을 갖추기까지 무던히 반복하고 연습한다.

그렇다면 함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서서 달려 나가자! 가만히 앉아 두려움의 이유를 나열해 본다. 무엇 때문에 불안한지 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 적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런 나를 잘 이해하는 멘토와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 많은 좋은 말로 조언을 늘어놓는 멘토보다는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 줄 리더가 필요하다. 그들은 염려나 두려움과 불안을 덜어줄 것이다.

아포리아에 빠져서 생각의 쳇바퀴같이 끝이 안 보이는 뿌연 브레인 포그가 어느 정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다음이 가장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다시는 이 죄의 문제에 혹은 반복적으로 사는 삶의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하나 적어본다.

기억하자. 회개만 하고 돌아서면 반쪽짜리 신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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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윤
현대문화를 통해 선교하는 제레미 윤(윤성운) 청년들을 사랑하는 목회자. 크리스천 서퍼스 코리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목사/선교사로 전도는 전도전사역Pre-evangelism을 시작으로 직접적인 구원영접까지 긴 삶의 연속을 함께하는 것. 이 비전 품고 서핑을 통해 젊은 이들을 ‘삶’으로 전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