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을 통한 큐티의 실례

큐티가 재미있고 묵상이 풍성하려면 관찰을 잘해야 한다. 관찰이 큐티의 절반을 차지한다. 관찰이 큐티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상에 길들어 있는 시대에 종이로 된 책 읽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몰라도, 큐티를 위해서는 읽고 관찰하기가 너무도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문자라는 도구를 통해 글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읽고 관찰하는 과정 없이 큐티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이번 글에서는 성경 본문 두 가지를 택해 관찰을 중심으로 큐티한 내용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두 갈래 인생길

17.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 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라 20.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7-22).

    두 가지 길
    이 본문을 관찰해보면 두 갈래 길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7절에 나오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다. 가까운 길이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는 길이다. 전쟁을 하게 되는 길이고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다. 관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다. 18절에는 어떤 길이 나올까? 홍해의 광야 길인데 돌아가는 길이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다.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두 가지 길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블레셋 사람의 길은 광야 길, 그리고 홍해 길과 땅의 길이 비교된다. 가까운 길과 돌아가는 길, 즉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는 길과 인도하시는 길이 비교된다.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길, 바닷길, 돌아가는 먼 길로 인도하신다. 비록 멀고 험하지만 가나안으로 가는 최적의 길이기 때문에 여기로 인도하신다.

    두 가지 길을 관찰하기만 하여도 많은 내용으로 묵상할 수 있다. 때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땅으로 나 있는 가까운 길이 아닌,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멀리 돌아가는 광야 길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실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가깝고 좋은 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는 광야 길로 인도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의 전쟁 때문에 마음을 돌이킬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어떤 길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길인가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생명의 길이다.

    요셉의 유골
    19절에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온 이야기가 나온다. 요셉 인생의 최종목적지는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임을 관찰할 수 있다. 애굽의 국무총리가 인생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만약 요셉의 목적이 애굽의 국무총리였다면 삶에서 겪은 여러 가지 위기와 기회를 다르게 이용했을 것이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도 출세의 발판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 인생의 목적지는 어디인가를 묵상할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라고 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21절 22절 보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온다.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다. 구름기둥은 성막 위에 머물러있는 큰 구름으로 자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불기둥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두 기둥을 관찰하고 묵상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들에게 오늘날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 하신다. 구름기둥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 일상 가운데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은혜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말씀을 묵상하거나 들을 때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는 구름 기둥의 은혜이다. 찬양을 부를 때에 우리의 가슴이 벅차오르고, 기도할 때 마음에 담대함이 생기고 두려움이 물러가는 은혜들이 구름기둥이 아닐까?

    우리가 평안할 때, 큰 어려움이 없을 때 일상 가운데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들이 구름기둥이라고 생각된다. 믿음의 눈을 열고 예민하게 바라보면 충분히 주변에서 볼 수 있고, 이미 경험하고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구름기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는 삶 가운데 불기둥의 은혜가 필요할 때도 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들, 기적과도 같은 은혜들을 베푸실 때가 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고난의 밤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은 불기둥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염려는 기도 제목

    6.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잘 알려진 말씀인데, 관찰을 통해 새로운 은혜를 묵상할 수 있다.


    6절을 잘 보면 ‘아무것도’와 ‘모든 일’은 동격임을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염려하는 우리에게 염려 대신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관찰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신앙 공식이 하나 생기는데 ‘염려거리는 기도제목’이다. 염려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험한 세상을 살면서 염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염려가 생길 때마다 그 염려거리를 기도 제목으로 바꾸라는 얘기이다. 염려가 찾아올 때 ‘아, 하나님이 나에게 기도하라는 사인이구나.’라고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기도와 간구로’라는 표현의 순서를 주목해 보자.

    기도와 간구는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일 수도 있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설명해 보자면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라면 간구는 특별한 기도 제목으로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기도를 먼저하고 기도 가운데 구해야 할 제목을 알게 되고 간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염려가 생겼는데,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이야기하다 보면 구체적인 간구의 제목을 생각나게 해주신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감사할 제목이 생각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염려가 기도로, 기도가 간구로 바뀌고, 자연스럽게 감사로 하나님께 아뢰게 된다. 순서대로 관찰하면 이렇게 묵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그러므로 믿음은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것이다.

    염려가 있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나? 기도와 간구의 과정을 거치면서 감사의 고백할 수 있게 된다. 기록된 순서를 따라 관찰하고 묵상하면 이런 은혜의 깨달음을 경험할 수 있다. 염려-기도-간구-감사, 이 순서를 기억하자. 염려가 많은 세상을 살아간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이다.

    우리가 걷는 길이 바른길인지 두려울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길이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염려 대신 기도하고, 감사하면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