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하는 선교

한국의 교단 관계자 몇 분이 뉴질랜드 교회의 형편을 알고자 방문하셨다. 손님들을 모시고 며칠을 지내며 나는 한국 교회의 현실도 알고 손님들은 뉴질랜드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보낸 자나 보냄을 받은 자나 서로가 이해하지 못한 면과 앞으로의 과제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서로 답답했다. 뉴질랜드의 한인 교회와 목회 현장의 형편을 이렇게도 모른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 역시 한국 교회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은 마찬가지였다.

뉴질랜드에도 한인을 대상으로 목회하는 목회자가 많고 세워진 교회들도 많다. 한편 선교사들도 많다. 한때는 뉴질랜드가 선교지냐는 논란도 있었지만 선교가 꼭 타민족, 타 문화권만을 말하던 시대는 지났다.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다민족 선교도 필요하고 한인들에 대한 복음전파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 이제는 한인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도 똑같이 선교사 개념으로 볼 필요가 있다.

나는 한국을 떠나오던 때, 오클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돌아온 교회 자매에게 이런 말도 들었다. “목사님! 뉴질랜드는 신앙생활 올바로 하는 것, 그 자체가 선교 아니겠어요?” 그 말에 굉장한 도전을 받았고 한인 목회의 중요성도 더욱 깊게 느껴졌다.

요즘 들에는 횃불나리(Tritoma)와 알로에(Aloe)꽃이 그야말로 횃불처럼 피어난다. 복음은 타오르는 횃불이기에 이 불을 꺼뜨리지 않고, ‘세상 끝까지’ 전달해 나갈 생명 있는 일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선교에 있어서 ‘가든지 보내든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 말은 리빙스턴 시대의 선교 표어 ‘스스로 가거나, 아니면 보내라(Go, or Send)’였다. 리빙스턴 시대만이 아니라, 선교의 역사에는 언제나 ‘최상의 선교사를 보내어, 최대의 생명을 구원하라(Put the Best, Get the Most)’는 외침이 필요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 빌립보서를 읽다 보면, ‘참여한다’는 말씀이 종종 나온다. 이런 ‘참여’를 ‘교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자기의 복음 사역에 빌립보 교인들이 성심으로 참여해 준 것에 대하여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

복음 사역 즉 선교에 참여하고 협력하는 것은 귀중한 일이다. 나는 교회에서 교우들에게 말하기를, 아무리 작은 교회라고 해도 복음 사역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며, 그러므로 선교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은 커피 한 잔을 덜 마시는 마음으로 선교헌금에 동참하여 내가 가지 못하고 내가 직접 하지 못하는 선교 사역에 후원하고 있다. 이 모든 일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교우들의 모습이 참 자랑스럽다.

복음 사역에 협력하는 것은 ‘참여하는 일’

은혜에 참여하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빌 1:7)

은혜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참여이며,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함이 우리에게는 은혜다. 그리고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하다가 매임을 당하는 일과 교제하는 것도 은혜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이런 은혜에 참여하여 줌에 대하여 대단히 감사한다. 이와 같은 은혜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괴로움에 참여하라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빌 4:14)

바울의 고백이 참 귀하다. 12절, ‘비천과 풍부, 배부름과 배고픔, 그리고 풍부와 궁핍’에 대하여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했는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이런 괴로움에 동참하여 준 것에 대하여 결코 잊지 않고 감사하고 있다. 이 일에 대하여 ‘잘 하였도다’라는 지극한 칭찬이 이어진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 힘들어하고 몹시 가슴 아파할 때 힘이 되어주는 일이나 또는 동참해 주는 일은 과연 귀중하고도 복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의 감사는 큰 감격에 차 있는 이유이다. 빌립보 교회가 어떤 성숙한 단계에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일을 감당했기 때문에 더욱 그 감사는 귀중하다.

주고받는 일에 참여하라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 4:15)

‘주고받는 내 일’이라는 말은 은혜를 나누거나, 사랑을 나누는 일 그리고 복음 때문에 수고하므로 물질을 나누는 일에 참여함을 말한다. 이런 일에 참여한 교회가 많지 않은 때, 빌립보 교회가 복음의 시초부터 이런 훈련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되다. 우리는 이 일에 신실하게 동참할 필요는 언제든지 있다.

쓸 것을 보내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 4:16)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 4:18)  

이는 선교 헌금이요, 선교에 동참하는 일이다.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바울의 사역은 언제나 어려웠다. 이렇게 어려울 때 한 번 두 번 쓸 것을 보내어주는 것! 선교사가 풍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형편을 떠나서 언제나 향기요, 제물이요, 기쁨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향기롭거나, 제물로써 드려지거나, 기쁨을 양산하는 일이 된다면 이는 놀라운 축복이다.

복음 사역에 협력하는 것은 ‘축복을 받는 일’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빌 4:17)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 4:20)  

빌립보 교회는 참여하는 자세로 교회 안으로는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교회 밖으로는 선교하는 모습으로 많은 교회의 본이 되었다. 하나님이 결국은 이런 교회에 축복하시고, 이런 성도들을 축복하심은 당연하다. 이런 일에 성도들이나 교회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모든 교회가 참여하는 모습으로써 전도와 고난과 구제와 선교에 동참해야 한다.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선교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말은 이미 말했었다. 또한 규모가 있고 여유가 있는 교회들만의 역할도 아니요, 선교는 교회의 프로그램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말도 역시 이미 했다. 빌립보 교회는 그야말로 개척 교회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선교에 동참하는 일에 주저할 수 있을까?

잘 생각해 보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선교에 동참하고 있나? 또 우리 교회가 복음 사역에 참여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물론 선교에 동참하는 동기나 목적이 축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엇을 함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겠지 하는 기복적인 생각이 은연중에 있지 않은가? 선교에 동참하는 것 자체가 축복이요, 혹시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축복은 그냥 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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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명균
총신신대원 졸업, 24년째 한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이어가고 있으며 총회세계선교회(GMS) 뉴질랜드지부장을 맡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에는 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경일독을 이어가는 을 5년째 집필하고 있고 뉴질랜드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교적인 시각으로 다시 보면서 이 이야기를 펼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