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누 네 카달?”

어느 나라를 가든 서바이벌 (survival 생존 필수) 문장들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물건 값을 묻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터키 (현, 튀르키예) 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터키어 학원 근처의 철물점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들어 갔습니다. 늙수그레한 터키 주인 인듯한 남자 한 사람이 나왔습니다. 당시 저는 터키어를 배우는 중이라서 조금 할 줄 아는 터키어로 가격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누 네 카달?”(이것 얼마예요?)

그러자, 외국 사람이 자기네 말 터키어를 하려고 하는 것이 기특해 보였는지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만일 터키어를 쓰지 않았더라면, 다른 가격을 얘기 했을꺼요!”라고 말입니다.

지금이야 가격 정찰제를 거의 대부분 상점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12년 전 터키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터키말 한 마디 썼다고 물건 가격이 달라지는 나라라니요…


그러면서 한국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돈 많이 벌어 우리 가족끼리 잘 먹고 잘살려고 30여 년 전 지상 천국으로 알려진 뉴질랜드에 이민 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하지만 뉴질랜드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인생이 180도 변한 것도 생각났습니다. 그러다가 13년 전 터키 선교사로 이스탄불도 아닌, 수도 앙카라까지 오게 된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눈 앞을 스쳐갔습니다.


1993년도에 점수제 이민으로 뉴질랜드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뉴질랜드 투어 가이드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잘 나가던 5년 여의 가이드 생활 끝에 IMF 경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오클랜드 공항 전체에 들어오는 손님이 아예 없었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한국 여행사 가이드 직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집에서는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5녀 1남, 딸 부잣집의 외아들이자 장남으로서 가부장적 집안 관습에 따라 모든 집안일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결혼 전까지도 방 청소 한번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민 와서 다급해지니 주방 일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앞치마를 두르고 뛰어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행사 동료 한 친구가 먼저 오니항아 쪽에 기존 런치바를 인수하여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런치바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빈 가게를 인수하여 작은 런치바를 오니항가에서 시작했습니다.

정말 새벽부터 힘들게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꾸 팔리지 않는 샌드위치 같은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해서, 남은 샌드위치 같은 것들을 우리 구역 식구들에게도 주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선 한국 음식도 아니고, 자주 주다 보니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돈도 잘 벌리지 않아서 약 2년 후 결국은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즈음 마침 한국에 계시던 모친께서 뉴질랜드 우리 집을 잠시 방문하셨습니다. 집안에서 금쪽같던 큰아들이 런치바에서 앞치마 두르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으이그, 외국 가서 돈 많이 벌어서 잘 산다고 가더니… 겨우 남자가 앞치마 두르고 주방에 들락날락 거리냐? 쯧쯧쯧…”

그러다가 핸더슨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선교학 시간이 되었습니다. 대머리에 키가 크고 건장한 글렌 이네스에서 교회 사역을 하는 그래함 목사라는 키위 목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막대그래프 하나를 우리 학생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의 각 종교권별 인구수와 그 종교권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의 수를 비교한 그래프였습니다. 그 그래프에서 세계 인구 중 제일 큰 비율을 차지하는 종교권은 기독교권(26억, 2023년 기준)이었고,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부분은 무슬림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구가 가장 많은 기독교권에서 활동하는 선교사 수 그래프가 가장 길고, 무슬림권은 인구가 21억(전 세계 인구가 4명 중 1명 꼴, 2023 기준)이나 되는 두 번째로 큰 부분인데도 선교사 수 그래프가 가장 짧았습니다.


“왜 무슬림권에 선교사 수가 가장 적은가요?”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선교 사역 상 여러 가지 위험 때문에 무슬림 권으로 선교사들이 들어가는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수업을 마친 후에도 내내 내 안에서 부딪혀 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다들 어렵다고 무슬림권에 안 간다면, 그 무슬림들에게 대체 누가 예수님을 전하나?”


지속되는 마음의 부르짖음을 외면하려 해도 자꾸만 그 선교학 시간에 보았던 그래프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성령님의 세밀한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또 무슬림 선교를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에 55개나 되는 이슬람 국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나라들을 다 선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습니다. 우선 본인 나이가 환갑을 앞둔 시기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뉴질랜드에서 아들 하나를 더 주셔서 이제 10대가 된 둘째 아들 쌤 Samuel의 교육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제가 가기를 원하시는 무슬림 국가 하나를 보여 주세요!”

그러면서 우리 한국을 형제 국가로 생각하며 엄청 좋아하는 무슬림 국가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국가 이름이 2022년부터 공식적으로 튀르키예로 바뀐 이전의 터키였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키위 사역자 부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터키에 직접 가지는 못하더라도 매월 조금씩이라도 후원해 보자!” 라는 마음으로 후원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뉴질랜드의 생활을 위해서 집에서조차 해보지 않았던 청소, 전에 해본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 커머셜(Office) 청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청소는 우리 가족이 터키로 떠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뉴질랜드에서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낮추는 훈련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예수 전도단 DTS 뉴질랜드 예수 제자 훈련에 가족 모두가 참석했습니다. 또 예수 전도단에서 터키 단기 선교를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비용상 저 혼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팀은 터키 동부 지역, 쿠르드 사람들이 주로 사는 지역을 돌았습니다.


길이나 집에서 터키인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기도 하고, 현지인의 집에서 차(터키어 ”차이”)도 얻어 마셨습니다. 때로는 “돌무쉬” (소형 버스) 차 안에서 만난 생면 부지의 터키인의 집에 숙박하면서 예수님 만난 간증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후 2012년 가족 모두가 터키로, 5백만 인구가 사는 수도 앙카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는 우리 가족 4명이 옷 가방 몇 개만을 들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보며 터키 앙카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뉴질랜드에서의 연변 과기대 후원회 경험을 되살려 “터키 수도 앙카라에 중국 연변 과기대 같은 기독 대학을 세웁시다! 그리고 전 세계 기독 교수들과 함께 터키 무슬림 대학생들에게 예수님을 전합시다!”라는 비전을 부르짖었습니다.

또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여러 교회에도 열심히 이 비전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교회에서도 이 비전에 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가면서 저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 안산의 연로하신 여목사 한 분이 아는 분을 통해 터키를 오게 되었습니다. 터키 7대 교회를 한 바퀴 돌아보고, 우리 사역도 본 후 한국에 돌아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터키 무슬림들을 선교하라고 지난 수년 동안 해오던 중국 선교를 못하게 막으셨나 보네요.”


그리고, 그 여목사께서는 우리가 터키에 입국한 지 약 4년 후인 2016년 약 2억원 (NZ $ 2십5만 불) 정도를 들여서 앙카라 시내 중심부에 방 4개 80평 정도의 사역 센터를 구입해 주셨습니다.

지금 이 사역 센터는 갈라디아 교회로서 터키어 예배(터키 담임 목사: 일케르) 가 잘 드려지고 있으며, D3 제자 훈련 장소로도 잘 사용되고 있는 중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