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흘류도프가 분류한 다섯 부류의 죄인

<크리스천 커버스토리에서 이어짐> 카츄사를 구해내기 위해 네흘류도프는 계속해서 교도소를 드나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카츄사의 부탁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온 여러 죄수를 도와주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도 듣고 또 변호사와 교도소 담당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네흘류도프는 보통 범죄자라고 부르는 죄인들이 다섯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계속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다섯 부류는 다음과 같다.
제1의 부류 카츄사처럼 오판에 의하여 형을 살고 있는 무고한 사람들이다. 전체 죄수의 7%에 해당한다.


제2의 부류 순간적인 분노나 질투와 같은 상황에서 저지른 행위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사람들도 같은 상황에서는 같은 행위를 저지를 것이 틀림없다.


제3의 부류 본인의 생각으로는 당연하거나 오히려 좋다고 생각한 행위가 그들과 상관없는 법률을 만든 인간의 생각으로서 범죄로 판결된 사람들이다. 밀주 판매업이나 대지주의 들에서 풀을 베거나 장작을 마련한 행위들이다.


제4의 부류 정신면에서 사회의 평균 수준보다 높은 사람들이다. 독립운동을 했거나 반정부 음모를 했거나 파업에 참가한 정치범 같은 사람들이다.


제5의 부류 사회에 대한 그들의 죄보다도 그들에 대한 사회의 죄가 훨씬 크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아 그들이 속해 있는 생활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살기 위해서는 범죄라고 불리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네흘류도프가 분류해 놓은 이 다섯 부류의 죄인들은 모두 그가 카츄사를 만나기 위해서 교도소를 드나들며 만난 죄수들이다. 따라서 모두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다.

여기에 한 부류를 더한다면 제6의 부류는 권력형 그리고 탐욕형 비리를 저지르고 들어온 범죄자들일 것이다. 권력이든 물질이든 가지고도 더 가지고 싶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탈취하다가 들어온 진짜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런 죄수들은 교도소에 없었다. 정말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그런 인간들은 돈과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면죄부를 받고 바깥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인간들은 위선과 의로움의 탈을 쓰고 다섯 부류의 죄인들을 심판하고 정죄하여 교도소로 보내고 있었다.

네흘류도프의 속죄
한때 자기가 사랑했던 청순한 여인이 자기의 잘못으로 타락하여 법정에 섰는데 자기는 배심원의 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에 네흘류도프는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구해내고자 마음먹는다. 구하는 것 뿐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그녀의 과거를 보상하기 위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과 속죄의 여정에서 네흘류도프는 밑바닥 인생의 죄수들의 삶 속에 들어가며 점차 사회의 모순과 잘못된 제도에 눈을 뜬다.


그렇기에 그가 만난 죄인들을 5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고 그중에서도 많은 죄수들이 특히 제5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는 과감히 선언한다.

나도 그가 말하는 제5의 부류의 죄인들에 대해 공감한다. 올바른 사회란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되어있는 사회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거의 모든 사회는 죄를 짓지 않으면 살 수 없도록 되어있다.


충분한 권력이나 금력이 있어 제도 위에 군림할 수 있으면 죄를 지어도 잡혀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면 비겁하고 나름 똑똑해서 힘 있는 자들에게 굴복하고 교묘히 법망을 피해 가며 살면 비록 위태로워도 잡혀 들어가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힘이 없어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끼니도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고 잘못된 현실을 그대로 참아낼 수만은 없어 목소리를 높여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애꿎게도 이런 사람들은 교도소행이고 그들은 제 5의 부류에 속하는 죄인들이 되어버린다.


네흘류도프가 분류한 제 5의 부류의 죄인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맨 처음 이 나라 뉴질랜드의 교도소를 방문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미 10년쯤 전의 이야기지만 나는 그때 밀알 선교합창단이란 선교 단체에 속해 있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찬양과 말씀으로 봉사하는 단체였는데 한 달에 한 번씩은 교도소를 방문하였다.

합창단원들 중 소정의 교육을 받고 등록을 마친 사람들이 교도소에 가서 수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같이 복음성가를 부르고 나중엔 간단한 하나님 말씀으로 끝을 맺었다. 노래를 못하는 내가 합창단원에 낄 수 있었던 것은 말씀 전하는 역할이 나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파레모레모(Paremoremo) 교도소에서 만난 수인(囚人)들
오클랜드 북쪽 교외의 파레모레모(Paremoremo)에 있는 교도소를 첫 방문하기로 한 며칠 전부터 계속 기도로 무장하였지만 나는 무언가에 눌리는 듯한 답답한 압박감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과연 그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떨리기만 하였고 방문 중에 그들이 난동이라도 부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공포심도 들었다.


드디어 그날 저녁이 오자 우리 합창단 모두는 산 중턱의 교도소를 향해 난 외길을 차를 몰고 들어가 교도소 입구에서 수속을 마친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화에서나 보았던 높고 높은 삼엄한 철조망 사이를 뚫고 들어가 우리에게 면회가 허락된 장소에 들어설 때까지 우리 모두는 완전히 얼어있었다.

그러나 강당과 같은 꽤 큰 실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겨주는 수인들(교도소에서는 inmate 라고 부른다)을 보고 그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안도를 했다.


오히려 자그마한 동양 남녀들이 그들 앞에 나타난 것에 우리보다 더욱 놀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대충 우리 소개를 하고 우리는 아직도 겁먹고 있는 가슴들을 서로 눈짓으로 진정시키며 찬양을 시작했다.

우리말로 해도 목소리가 잘 안 나올 터인데 연습은 해서 갔지만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영어로 복음성가를 하려고 애를 쓰는 우리를 도와주려는 듯 오히려 더욱 큰 소리로 우리와 합세해 찬양을 따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차차 힘을 얻었다. 그렇지만 찬양이 끝나고 말씀을 전하는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 앞에 나서는 나의 심정은 참으로,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전하려는 것이니 제 입이 굳어서 버벅거리거나 말이 안 나오면 당신께서 망신당하는 것이니 알아서 하십시오,’ 라고 기도하면서 강단에 서니 준비해 간 말씀 생각은 안 나고 별안간 “여러분 저는 키위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에는 반드시 한국말 한 가지를 가르쳐드립니다. 여러분도 이 말은 꼭 아셔야 합니다.”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어리둥절해 있는 인메이트(수인들)에게 I love you in Jesus가 한국말로는 ‘예수 안에서 사랑합니다’라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알려주었다. 그런 다음 나를 따라 하라고 막무가내로 몇 번 반복하자 모두가 서툰 발음으로 따라 하다가 결국 다 같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분위기가 아주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시작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들의 진지한 표정에 다시 한번 놀랬다. 그들 눈에는 참 별 볼품 없었을 아시아의 한 작은 노인네가 서툰 영어로 전하는 말씀을 한 사람도 한눈을 팔거나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경청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무사히 말씀을 다 전하고 모임이 끝나 헤어질 때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면서 “Thank you, sir”를 연발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몇몇의 눈시울은 벌겋게 변해 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저녁 모임이 끝난 뒤 차를 몰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저들은 우직하여 죄를 짓고 발각되었기에 저 안에 있고 우리들은 교활하여 죄를 짓고도 발각되지 않았기에 이렇게 바깥에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드오.” 아내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아마도 그때 우리는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네흘류도프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심판할 수도 교도할 수도 없다’는 교훈을 파레모레모의 수인들을 통해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네흘류도프의 부활
소설은 마지막에 가서 반전한다. 그토록 간구했던 특사가 카츄사에게 내려져 자유의 몸이 되지만 그녀는 네흘류도프를 택하지 않고 감옥에서 사귄 정치범 시몬손을 택한다. 네흘류도프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제는 네흘류도프를 속죄의 부담감에서 해방해 온전히 놓아주어 그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려는 그녀의 고결한 마음씨였다.

언젠가 네흘류도프의 누나가 카츄사에게 집착하는 동생을 보고 네가 그런 여자의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네흘류도프는 ‘난 그 여자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바로잡으려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었다.


기나긴 여정이었지만 카츄사도 네흘류도프도 사랑을 통해 스스로를 바로잡았다. 그 사랑은 보통의 남녀의 사랑을 뛰어넘는 숭고한 사랑이었다. 톨스토이가 항시 주장해 왔듯 더 죄 많은 인간이 오히려 자기들보다 죄가 덜한 사람들을 심판하는 제도로는 결코 세상도 사람도 바로 잡을 수 없었다. 세상과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었다.


카츄샤를 보낸 뒤 네흘류도프는 사회와 질서가 그나마 존재하는 것은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제도 때문이 아니라 그런 속에서도 사람들이 여전히 서로 동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뒷받침을 복음서에서 찾으리라 생각하고 마태복음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여러 번 읽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복음서의 참뜻이 마치 해면이 물을 흡수하듯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사랑의 참뜻을 깨닫고 21장의 포도원 농부의 우화에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이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신하고 드디어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은 너희들에게 더해지리라’는 말씀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먼저 구하라는 그의 나라와 의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너희들에게 그냥 더해지리라는 다른 모든 것들만 찾고 있었으니 그것들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날부터 네흘류도프에게는 새로운 생활 즉 부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에게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의의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소설 ‘부활’은 끝났다. 마지막 줄을 다 읽고서도 한참 나는 책을 놓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계속 ‘너는 이제껏 무엇을 구하며 살았느냐?’라는 질문이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35세의 청년에 불과한 네흘류도프지만 부활의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책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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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찬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사업 하다가 1985년 거듭남. 20년 간 Auckland Christian Assembly를 장로로 섬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성현의 말씀에 힘입어 감히 지나온 삶 속에서 느꼈던 감회를 시(詩)와 산문(散文)으로 자유롭게 풀어 연재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