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의무인가? 아니, 특권이다

선교지에서 장벽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먼저는 언어장벽을 말한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2년 동안은 사역에 대한 욕심보다는 언어 훈련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그 이유이다. 복음을 전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해도 언어의 방법이 가장 확실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언어 말고도 선교의 장벽은 얼마든지 많다. 타문화, 타민족에 대한 친화력을 말하는 것은 매우 광범위한 것을 한꺼번에 말하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음식이지 않겠는가?

어느 해 방글라데시의 다카를 방문했을 때, 우리 일행은 저녁 식사로 똘까리 한 접시를 받아 놓고 서로의 눈치를 봤었다. 방글라데시 대표 음식인 똘까리는 우리가 즐겨 먹는 카레라이스와 비슷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부감을 느낀 것은 뭔가 모를 강한 향 때문이었고, 또 걸쭉한 음식을 숟가락 없이 손가락으로 한 줌 한 줌 모아서 먹는 것이 그랬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은 거침없이 맛있게 먹고 있으니, 다들 그를 선교사 체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었다. 가이드는 현지인이 대접하는 음식을 두고 의무적으로 한 그릇 비우라고 했지만 그는 이슬람교도들이 크리스천에게 대접하는 이 귀한 특권을 마다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나 선교에 대해서는 침묵은 있을 수 없다. 많은 선교지에서 말하는 선교의 또 다른 장벽 중 하나가 선교에 대한 침묵을 말한다. 특히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선교 이야기는 어디로 인가 은근히 숨어버린 듯하다. 우리가 침묵할 수 없는 것이 복음이요, 전도이고 선교이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있어서 선교는 의무는 아니요 오히려 특권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16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이라 했고, 또 하나는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 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종사하는 자의 의무를 넘어서서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아브라함 이야기로 돌아가 의무와 특권 사이의 그 귀한 사명을 다시 생각해 본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바벨탑 사건 이후에 인간 문명이 위기에 부딪혔을 때였다. 선교 사역자들은 인간 문명과 시대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소명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어떻게 받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매우 타락한 시대 환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속 역사의 줄기를 이룬 사람이니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의무로 감당했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요, 특권이라 여겼을 때 비로소 그 많은 장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창세기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본토를 떠나라
소명의 시작은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것을 의무로 여겨 감당하는 것과 특권으로 여기는 것에는 정말 많은 차이가 있다. 소명의 명령은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떠나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떠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은 ‘떠나라’이다. 신앙 생활할 때,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은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의지하고 살던 땅을 떠나라는 말이다.


본토를 떠나라는 명령은 물질 중심의 삶과 우상숭배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물질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고,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라는 명령이고, 삶의 근원을 우상이 아닌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본토에서 살 때는 이미 달과 별을 숭상하는 우상 종교가 만연해 있었다. ‘우르’라는 지명은 ‘빛’ 혹은 ‘불’이라는 뜻으로 불을 숭상하는 우상 종교의식에서 생겼다. 본토는 우상숭배의 중심지이니 우상숭배적 생활 방식을 탈피하라는 명령이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물질과 생활 방식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은가?

친척을 떠나라
친척은 인정 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란을 떠날 때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브라함은 생애 거의 절반을 하란에서, 나머지 절반은 가나안 땅에서 보냈다. 지금까지 서로 격려하고 힘쓰며 살던 곳에서 떠나라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명령이다. 친척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명령이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높이던 생활과 좋지 못한 인간관계를 청산하라는 명령이다. 사람 중심이 되어서는 확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아! 아버지~, 나에게 아버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내가 애비 없이 낳은 사생아란 말이 아니라 충청도 촌놈은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다. 서울로 이사 와서 친구들이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어색했는지 모른다. 충청도에서는 ‘아부지’라 불렀다. 그러나 그 아부지도 나에게는 계시지 않았다. 내 나이 일곱에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가셨기 때문이다.

나도 ‘아버지가 계셨으면 ~’ 생각할 때가 참 많았다. 그를 의지하면 분명 공부하고 사회생활 하는 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만큼 아버지, 그는 큰 버팀목이요, 평안과 안전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버팀목과 안전함을 버리고 완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거듭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는 어느 때는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하여 사사로운 일들과 안일한 일들을 과감히 벗어버려야 한다. 선교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선교는 금수저 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자꾸 아버지의 집에 의지하면 하나님의 것을 이룰 수 없다.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는 땅은 미개척지이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의 발달한 문화는 고고학적 발굴로 그 사실이 증명된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답게 모든 것이 훌륭하다. 그에 비하면 가나안은 미개지인 셈이다. 이를 문화적 측면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신앙적 측면으로 보는 것이 맞다. 선교는 문화 전달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떠나온 갈대아 우르, 하란도 그랬지만 가나안 역시 우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부동산업자가 보여주는 땅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소명은 결코 의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사명이다. 그의 어떤 의로운 행위를 보고 택하신 것이 아니니 더더욱 의무가 아닌 특권으로 여겨야 한다. 이 특권을 너무 강조하고 남용하여 이스라엘의 자손이 된 것을 자랑하는 유대인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자격에서 특권을 누리지 말고 사역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의무도 중요하지만, 의무에 머물러 사역하다 보면 억지가 앞서고 슬프고 외로운 순간을 많이 겪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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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명균
총신신대원 졸업, 24년째 한인을 대상으로 목회를 이어가고 있으며 총회세계선교회(GMS) 뉴질랜드지부장을 맡고 있다. 크리스천라이프에는 를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성경일독을 이어가는 을 5년째 집필하고 있고 뉴질랜드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선교적인 시각으로 다시 보면서 이 이야기를 펼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