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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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계주라 불리는 릴레이는 각 개인의 속력을 합리적으로 연결시킨 단체 운동으로 선수 개개인의 능력보다 4명의 협동심과 단결심이 요구되며, 400m, 800m, 1500m 경기가 있다. 통상 가장 빠른 선수를 마지막 주자로, 그 다음 빠른 주자를 첫 번째 주자로 배치하는 이유는 처음 주자가 거리를 벌린 다음, 두 번째,세 번째 주자가 리드를 당하더라도 마지막 주자가 만회를 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릴레이의 핵심은 바통을 전달하는 과정이다. 바통을 받을 주자가 준비 동작을 할 수 있는 거리는 10m의 준비 지역을 포함하여 30m이지만 바통을 주고 받는 동작은 반드시 20m 바통 터치 존에서 해야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통을 주는 주자와 받는 주자의 속도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바통을 주고 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 한다.

지난 8월 브라질 리우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 대회 중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남자 400 미터 릴레이 결승에서 2위로 들어오며 은메달을 가져간 일본의 기록이다. 1위 자메이카(37초 27), 2위 일본(37초 60), 3위 미국(37초 62), 4위 캐나다(37초 64)의 기록처럼 일본은 간발의 차이로 미국을 제치고 2위로 결승점에 들어왔다. 미국 팀은 나중에 비디오 판독을 통해 바통 터치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실격되고 캐나다가 동메달을 가져가게 된다.

여기에서 특별한 기록이나 슈퍼 스타가 보이지 않던 일본 계주 팀의 성적에 일조를 한 것은 특이한 바통 전달 방식이었다. 일본 계주 팀은 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전달할 때 통상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바통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밑에서 위로 바통을 전달해 주는 ‘언더핸드 패스’ 방식을 사용했다.

기존 방식에 비해 바통을 전달 받은 다음 주자가 전력질주 자세를 완벽하게 갖추기까지 신체가 흔들리는(요동) 현상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일본 계주 팀은 ‘언더핸드 패스’ 방식을 집중적으로 훈련했고, 그 결과 효율적인 바통 터치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릴레이의 묘미인 바통 터치 방식의 중요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최고의 속력을 유지하였다 할지라도 서로간 호흡이 맞지 않아 바통을 놓치거나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하면 순식간에 등수가 바뀌어 버리는 것이 계주 경기인 것이다.

그리운 장로님, 권사님
한국에서 목회하던 시절 가장 마음에 감사함으로 남아있는 것이 훌륭한 장로님과 권사님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섬겼던 교회들이 전통 있고 비교적 규모가 큰 교회이다 보니 연륜이 있고 본이 되시는 장로, 권사님들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다. 평생을 변함없이 새벽 제단을 지키며 늘 말씀을 따라 살려 하셨던 장로님, 기도의 용사가 되어서 늘 기도로 섬김의 본을 보이신 권사님, 묵묵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봉사의 삶을 사셨던 집사님, 이민 목회를 하면서 많은 시간 중보 기도를 드렸던 부분이 평신도 지도자에 대한 부분이다.

반가운 것은 근자에 같은 교단 교회에서 2번째 장로, 권사, 안수집사 임직식을 갖게 되었다. 어렵고 힘든 이민 생활 가운데서도 늘 변함없이 성도의 본을 보여주셨던 분들이 임직하게 되어 기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13년전 세워졌던 2분의 장로님은 이제는 한 분은 하늘나라로 가셨고 또 한 분의 장로님은 은퇴를 앞두고 있다. 새롭게 젊은 일꾼들이 바통을 이어 사역을 이어가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이번 임직식에 앞서간 두 분 장로님들이 착용하셨던 장로 가운을 후배 장로님들이 물려받아 사역을 이어간다 하니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장로의 자리는 외부에서 바라 보기엔 명예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에 들어가면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서 양쪽으로부터 눈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위치이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들을 필요가 없는 비난과 불평을 수없이 들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평신도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용어가 ‘평신도’라는 단어이다. 사전적 의미로 평신도는 기독교에서 성직을 받지 아니한 신자를 일컫는다. 한국교회에서는 교인, 교우, 성도를 평신도라 부른다. 목사는 별도로 신학 과정을 이수하고 안수를 받은 사람이기에 성직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안수는 목사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안수집사도 임직시 안수를 받는다. 그러기에 안수 자체가 직분자를 구분하여 성직자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단지 신학을 전공하였다고 해서 그를 성직자라고 하지 않는다. 신학교 교수 중에는 성직자가 아닌 교수들도 있다. 결국 신학 전공이나 안수가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개신교에는 별도의 ‘성직자’ 직분이 없다. 이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성직자인 사제직을 폐지한 이유와 맥락을 같이한다.

신약교회에서 목사, 장로, 교사, 또는 집사 등의 직분은 신분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사역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 내의 직분만 성직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신자들이 담당하고 있는 모든 직업이 다 거룩한 소명을 지닌 성직인 것이다. 도의적인 문제만 없다면 신자에게 천하거나 속된 직업이란 없다.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돌보는 것도 성스러운 사역이고, 남은 여력으로 이웃과 사회를 돕는 것 또한 매우 성스러운 사역이다.

폴 스티븐스 교수는 말하기를“성경에 기록된 헬라어 ‘라오스’라는 단어는 평신도나 성직자의 구분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여러분들은 안수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다”라며 사역의 위대함을 강조하였다. 성경은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 등을 서로 보완적이며 협력적인 직분으로 서술하고 있다. 다만‘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라’(디모데전서 5:17) 하였다. 우리가 스승을 존경한다고 해서 스승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지는 않는다. 가르치는 일에 관련된 권한과 책임을 위임한 것이다.

직분자는 근본적으로 ‘섬기는 자’이다. 십자가의 도는 사랑과 섬김이다. 땀 흘려 일하는 모든 직업이 다 고상한 성직이며, 모든 신자가 다 거룩한 소명을 지닌 성직자인 것이다. 목사가 중요한 임무를 맡은 직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다른 신도보다 더 크거나 더 성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베소서 3:8)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참으로 비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