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1-8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3단계의 회심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형식적 회심은 모양만 바뀌어진 것입니다. 절에서 하던 그 비나이나 비나이다 하던 것을 교회로만 바뀐 것입니다. 이름만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내용은 똑같습니다. 아프면 귀신이 들려서, 내일 이사를 해야 하는데 좋은 날이 언제인지, 점치러 다니고, 아이들 예언기도하러 다니고, 이름 지으러 다니고, 뭐 모양만 바뀐 것입니다.
두 번째 내용적 회심은 예수님도 알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도 압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압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적 부와 안락함과 영화를 추구합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 잘 먹고, 잘 살고, 높아지고, 많아지고, 더 커지고 하는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아직 가치관의 회심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core value 가 안 바뀌어진 것입니다.
세 번째 가치관의 회심은 가장 중요한 내 내면의 중심에, 정말 가치있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바가 성경적 가치로 바뀌어진 것을 말합니다. 낮아지는 것이 더 좋고, 섬기는 것이 더 좋고, 나를 희생하는 것이 더 좋고, 나누는 것이 더 좋고,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복(福)이 무엇이냐?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의 것이다.“ 복되도다, 마카리오스라는 말입니다. 윌리암 바클래이라는 분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삶의 기회와 변화에 좌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이 그 복을 줄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복은 그 누구도 손댈 수도 공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 나라의 복이라는 것은, 행복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세상의 변화와 상황에 의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금주에 성경공부를 한 내용 중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들었던 간증들을 배경으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각색해 보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합니다. 해산의 때가 다 되었습니다. 정말 먼 길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출발하려고 하는데 옆 동네에 사는 부자가 자기도 베들레헴으로 가야 하는데 혼자가는 것이 심심하니 같이 가자고 해서 부자의 마차를 타고 아주 베들레헴까지 편하게 갔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을 하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방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도착을 해서 보니 방이 하나 있는데 제일 비싼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망설이고 있으니까 어떤 또 다른 부자가 하나님이 누구를 도와주라고 해서 보니 바로 당신인 것 같다. 여기 숙박비는 내가 다 낼테니까 편하게 있으라…그런데 마침 또 방 옆에는 제일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가 있어서 최고의 의사에 의해서, 제일 비싼 방에서, 가장 편하게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금주 금요일 본문은 예수님과 함께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자, 이제 바다를 건너가자 하셔서 제자들이 예하고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광풍이 불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가자고 해서 가면 바다가 잔잔하고, 순풍이 불어서 편안하게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광풍이 불어서 바다에서 살던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두려움에 떨면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만약에 화려한 마차와, 부유한 방, 안락한 침대의 삶이 복된 삶이라면 아마 주님은 그렇게 세상에 오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인생에 아무런 풍랑과 파도가 없는 삶이 복된 삶이라면 주님의 제자들은 풍랑이 없는, 잔잔한 삶, 아무런 풍파가 없는 삶을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가난한 자,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라는 의미는 아주 특별합니다. 헬라어에는 가난이라는 말이 페나스( Penace) 라는 말과 프토카스라 (putokas) 는 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페나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프토카스라는 말은 구걸을 해야 할 정도의 극빈자의 상태를 말합니다.
내 마음, 내 심령이 이렇게 누구가의 도움을,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상태가 되어져 있는 그 사람은 복이 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마태복음4:23-25)
천국 복음을 듣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따릅니다. 어디까지 따라옵니까? 산 위에까지 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태복음5:1)
세상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아픔과 고통과 가난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예수를 통해 천국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참다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음을 알고, 그 예수와 함께 하는 사람들, “그들이 복이 있다. 천국이 바로 너희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맨션이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의 나라, 예수와 함께 하는 나라입니다. 가난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나, 세상 나라에서 정말 참다운 행복과 참다운 기쁨이 없어서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새로운 시민으로 살기를 작정하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바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나라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삶을 살고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훈련하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예수 나라의 시각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며 이 세상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가난, 가난해 보셨습니까? 저는 가난의 경험이 있습니다. 가난은 부끄럽게 하고, 움츠리게 하고, 행복하지 않은 경험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모든 가족들은 그 가난이 하나님을 다시 찾게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가난이 욕망과 욕심과 죄악으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삶의 문제와 고통이 좌절과 절망과 포기와 염려와 근심과 자포자기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복된 삶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임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풍랑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보다 고통 보다 더 크신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 그 분 앞에 예수와 함께 하고 있는 이 시간이 복된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삶에 그 분을 찾고 그 분이 채워주는 충만으로 사는 삶, 그것이 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