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욥, 하나님의 양손에는

구속 역사의 시작에서 아브라함과 욥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구속 역사의 시작이라는 말 때문에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영원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구속 역사는 성경에서는 아담 때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물론 구속 역사는 계속 전개되었고, 노아 홍수 이후에도 당연히 구속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구속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선택된 백성을 세우시고 구속의 본류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
창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런 구속의 역사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하나님의 구속의 원칙이 있다. 구약을 볼 때 놓쳐서는 안 되는 역사적인 사실 한 가지는 욥기의 시대성이다. 구약 성경에서 욥기는 역사서 다음에 놓여 있다. 구약 성경의 배열 방식은 모세오경 → 역사서 → 시가서 → 선지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면 욥기의 시대성이 매우 늦은 후대에 속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욥기의 시대성은 아브라함과 동시대로 보는 경향이 많다. 욥기의 저자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모세로 본다. 모세가 기록했다면, 모세의 시대를 넘어설 수는 없지 않을까? 이렇게 아브라함과 욥의 시대성을 거의 동시대로 본다면, 이는 구속사의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구속적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 출신이요, 욥은 우스 사람이다. 성경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르와 우스는 동일 지역에 대한 표현으로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구속의 큰 틀을 세우시는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에 우선 아브라함을 세워 선민 구속의 역사를 주도하셨다.


동시에 욥을 세워 이방인 구속의 역사도 주관하셨다. 오른손, 왼손의 의미를 배제하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인생을 죄악의 자리에서 이끌어내실 때, 자신의 오른손에 아브라함을 붙드시고, 자신의 왼손에 욥을 붙드시면서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참으로 생각할수록 놀라운 광경 아닌가?

나중에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하실 때 천사를 보내어 롯과 그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내시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천사들이 각각 그 손으로 한 사람씩 잡고 이끌어낸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욥,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으시고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심이 얼마나 감격적인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욥 중에서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민의 시작으로 사용하시고, 욥을 이방인의 구원의 모델로 사용하셨다. 이 부분을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을 선민으로 선택하심에 아브라함을 향하여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을 이루실 것이니 아브라함이나 데라가 크게 유명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큰 어려움이 없다. 하나님께서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자를 어떻게 구속하실 것인지를 직접 보여주실 것이, 아브라함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동방의 큰 자라고 불렸던 욥을 이방인 구원의 모델로 삼아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는 것과 이방인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아브라함의 집안을 사용하시는 것보다 욥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사건과 욥에게 시험을 주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들이다.

욥, 동방의 큰 자
욥기 1:1-3,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 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낙타가 삼천이면 오늘날로 치면 트럭이 3천 대라는 뜻이요, 암 나귀가 오백이면 승용차가 5백 대라는 뜻이다. 소가 오백 겨리라면 트랙터가 그만큼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양이나 소는 오늘날의 식품회사, 의류회사 또는 농업과 목축업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오늘날로 보면 운수회사나 물류회사, 의류회사나 식품회사, 나아가서 농사의 모든 것과 목축의 모든 것을 한 사람 욥이 다 관장하고 있으니 큰 자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욥을 큰 자로 다 알고 있는 인정받는 욥이 한꺼번에 큰 어려움을 당해서 하루아침에 완전히 망한다. 욥이 워낙 큰 자이기 때문에 욥이 당하는 큰 고통과 어려움은 더욱 확실하게 많은 사람들로 알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욥과 세 친구가 하나님에 관한 토론을 시작할 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렇게 욥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하는 것이 별로 유명하지 않은 아브라함의 집안을 사용하시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어서 이방인도 구속의 대열에 합류하시는 하나님의 원칙을 알게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욥기에 나오는 욥과 세 친구 또는 엘리후까지 포함해서, 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대단히 정확하다고 본다. 단지 이들에게서 ‘죄 있는 자를 하나님이 치신다. 그러므로 욥은 죄를 지었음에 틀림없다’라는 생각만을 제외시킨다면, 이들의 하나님의 대한 고백은 대단히 정확하다.


심지어 욥기에서와 같이 사람들의 토론에 하나님이 직접 참여하셔서, 모든 것을 정리해 주는 경우가 성경에 나타난 적이 거의 없다. 이처럼 이방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가득 담긴 성경책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할 정도로 욥기는 귀중하다.

따라서 욥기의 주제를 말하자면 <의인의 고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방인의 구원>이라고 해야 더욱 정확하다. 즉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는 이렇게도 깊고 오묘하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을 시조로 하여 다른 종족을 무시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지 알지 못하는가를 잘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에 이방인을 소홀히 취급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서 명확하게 보여준다. 물론 아브라함을 구속의 가장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결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과 욥을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래서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가 변론했다.

사도행전 15:7~9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음을 줄기차게 증거한 것이다.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성경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하나님의 선교가 얼마나 대단하신 지 알 수 있게 된다. 성경 속에 선교의 동기가 있고 목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