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횡포

한국 사회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단어가 있다. 바로 ‘갑질’(Gapjil)이란 단어다. 갑질이란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
람이 권한을 남용하여 상대방에게 부당한 요구나 처우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갑질은 이제 단순한 개인적 행위를 넘어 우리 사회의 큰 병폐인 갑질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 갑질의 횡포로 목숨을 끊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2020년 5월 10일에 우이동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최 모 씨(향년 59세)가 아들뻘 되는 입주민 심 모 씨에게 수차례 폭언과 폭행, 갑질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경비원 최 씨가 이중주차되어 있던 심 모 씨의 차량을 밀어서 이동시켰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폭언과 폭행, 협박을 당했을 뿐 아니라 머슴이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그리고 강남 압구정동의 신현대아파트에서 근무하던 경비원 이모 씨(53세)는 주민 A씨(70대)의 폭언 및 모독을 견디다 못해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차 안에서 분신을 기도, 전신 화상의 중상을 입고 투병 끝에 결국 사망했다. 주민 A씨는 경비원 이 씨에게 욕설을 했을 뿐 아니라 아파트 5층에서 음식을 던지면서 이거나 집어 먹으라며 심한 모독을 했다고 한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갑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자신을 깊이 돌아봐야 한다. 

나는 늘 어려운 자들을 볼 때면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본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어쩌면 그들보다 더 비참한 인생으로 살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어려운 이들 앞에서는 더욱 겸손해진다.



한국을 방문할 때면 내가 머무르는 아파트가 있다. 우리 동에는 나이 든 경비원 두 분이 교대로 근무를 하신다. 한국에 도착하는 첫 날은 항상 먼저 경비원들을 찾아 인사를 나누고 20만 원을 담은 봉투를 드린다. 그리고 밤마다 나가서 야식을 사다 전해 드린다. 때때로 외식을 하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포장해서 갖다드리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 명절이 되면 뉴질랜드에 있을 때도 이웃에 있는 우리 처제를 통해서 늘 약간의 위로금을 전해 드린다. 물론 경비원들에게만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를 청소하는 분들도 늘 챙겨 드린다. 

내가 굳이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선행을 드러내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사실 글을 쓰면서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흉내라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비워 두시고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섬기다 돌아가셨다. 이런 엄청난 은혜 속에 살아가면서 내 형제들에게 갑질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려고 오셨다. 

믿음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빛은 착한 행실이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제는 이 암울한 시대에 기쁨을 주는 진정한 빛이 되어야 할 때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기도원의 일꾼들
한때 한국을 방문할 때면 첫날 밤은 항상 오산리기도원에서 기도를 했다. 오산리기도원은 내가 머무는 곳에서 2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에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개인 기도실이 있기 때문에 즐겨 찾았다.



한번은 도착한 날 오산리기도원을 가려고 차를 몰고 나왔는데 바로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폭우가 심하게 쏟아졌다. 잠시 길에 차를 멈추고 가까운 곳에 기도원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감사하게도 20여 분 떨어진 곳에 대형 교회의 수양관이 있었다. 그곳은 매우 아름답고 시설이 좋았다. 

그 이후로 시간이 나는 대로 그곳을 즐겨 찾았다. 이렇게 좋은 기도원을 세운 교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늘 그냥 사용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이 있어 사무실에 찾아가 100만 원을 감사헌금으로 드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원을 찾다 보니 그곳에서 섬기는 여러 분과도 친분을 갖게 되었다. 수시로 그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교제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분들의 노고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특별히 겨울에 눈이 쌓이면 입구부터 산 정상까지 직접 눈을 치웠다. 

수백 명의 식사를 만들고 방 청소까지 담당하는 몇 분의 주방 식구들은 정말 수고가 많았다. 그런데 그분들은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서 온 조선족이었
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한 번씩 그분들을 모시고 좋은 식당에서 대접해 드렸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함께 나가지 못하면 음식을 주문해서 드렸다. 

한번은 기도원 책임자와 대화하는 중에 그분들의 월급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밤낮없이 고생을 하는데 고작 매달 100만원 남짓 받는다고 했다. 원래 교회가 사역자들의 사례에 인색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하는 것 같았다. 

돈이 없는 교회도 아니고 한국에서 몇째 가는 대형 교회가 말이다. 진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임금을 적게 주기 위해 주로 조선족을 채용한다고 했다. 본인도 안타까워 당회에 수차례 건의했으나 ‘교회는 돈 버는 곳이 아니고 섬기는 곳’이라면서 일축했다는 것이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세상보다 많이 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세상에서 주는 만큼은 줘야 할 것 아닌가?


그 이후로 매번 봉투를 준비해서 그분들을 위로하였다. 요즘 코로나로 오랫동안 한국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늘 어려운 그분들에게 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약간의 위로금을 책임자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인색하면 안 된다. 성경의 원리는 아끼는 것이 아니라 풍족하게 베푸는 것이다. 일꾼들의 마음에 아픔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가족들을 떠나 외지에서 몇 푼이라도 벌려고 애쓰는 가난한 자들에게 교회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가르친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깝기 때문이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실 때에 수차례 애굽의 종 되었을 때를 기억하라고 하셨다. 우리도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도움을 얻고 살 때를 기억하면서 가난한 자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내려 주신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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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태
뉴질랜드 Assembly of God Bible College 졸업. 오클랜드 인터내셔날처치 담임목사. AEC 및 다니엘캠프장 이사장. 저서로는 ‘이른 비의 기적’과 ‘늦은 비의 기적’을 통해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물질의 법칙’을 알려 주는 재물이야기를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