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어느 저명한 생태학자와 행동 경제학자의 대담을 유튜브를 통해 본 적이 있었다. 개미의 자기 집단을 위한 선택과 이타적 행위에 대한 생태학적 분석, 그리고 행동 경제학자 관점에서 살펴본 이타적 집단의 유용성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 두 분의 학자가 관찰하고 이해한 이기심과 이타심에 대한 성찰은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각기 다른 분야를 연구 한 두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이타적 존재들로 구성된 집단, 또는 사회가 이기적 존재들로 구성된 사회에 비해 강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하려는 집단과 타인을 지키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집단의 모습은 굳이 이들 집단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행위의 당위를 떠나서도 각각의 집단이 가지고 있는 실질적 힘의 응집에서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었다. 똑같이 총을 들고 대치하고 있는 양 진영의 병사들 중 내가 살기 위해 동료를 떠미는 진영이 내 동료를 살리기 위해 나를 희생하는 진영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집단 간의 대립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사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부족함을 채우며 상생의 노력을 끊임없이 이루어 가는 사회는 우리가 쉽게 경험해 보지 못할지 언정 상상만으로도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 둘의 대화는 우리 사회가 무엇으로부터 힘을 얻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은 서로에게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그것은 안타깝게도 바로 그 타인을 위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나 끝없는 이기심으로 뭉쳐버리게 된 현대 한국 교회의 암울한 이면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놓고 말았다.
우리가 선교를 그리스도 사역의 확장이란 측면에서 살펴보았을 때 교회는 타인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그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함으로 그를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스스로를 위한 존재가 아닌 온전히 타인을 위해 살아냈던 한 인간의 시간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의 가치는 그렇기에 저 너머 피안에 존재하는 희미하고 추상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의 삶 그 한 복판에서 우리 이웃으로 사셨고 고난당했으며 끝내 숱한 민중의 한 사람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만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의 실천에 있는 것이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현대 기독교 사상에 깊은 성찰을 남긴 신학자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남긴 많은 신학적 자산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해 버린 기독교 본질과 그 회복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주장했던 한 가지를 우리가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를 실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발견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의 기원을 우리 믿음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삶은 어떠한가? 다른 모든 문명이 그러하듯 교회가 조직되고 제도화의 과정을 거치며 권력의 맛을 알게 된 종교 지도자들은 개인의 구원과 신앙을 강조하며 교회의 모든 기능을 종교적 행위로 축소해 가두어 놓고 말았다.
역사를 따라 흐르며 그들이 변질시켜 버린 교회는 어느 순간 그리스도의 삶을 종교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 오히려 타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권력의 정점에 서더니, 지금은 이내 타자를 대적하고 증오하는 집단으로 남아 세상의 천덕꾸러기로 소멸의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울 뿐이다.
성공회 신학자 미라슬로브 볼프(Miroslav Volf)는 교회를 부흥으로 포장해 세상의 중심에 서게 하려는 노력이 하나님의 뜻 인양 해석하는 것은 초대교회를 잘못 이해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세상의 비난과 걱정 가운데 놓인 교회,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 그 자체만을 존재 목적으로 삼는 교회. 우린 어쩌면 히틀러가 증오를 무기로 삼켜버린 20세기 초 유럽 한복판에 다시 서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교회가 증오를 자양분 삼아 그리스도를 수단화 시키고 히틀러를 찬양하는 집단으로 전락했을 때, 본회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타자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세상의 중심에서 외치는 부흥이 아닌 주변부의 신음에 함께 숨죽여 흐느낌으로,
이 모든 고통을 생산하는 부정의(不正義)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함으로,
비로소 이 땅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이다.
나와 우리의 문제를 넘어선 타인의 고통과 신음 속에서 우리는 확장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인식한다. 교회 안에 갇혀 있던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다시 이 땅 위를 걷게 될 것이다. 세상의 관심에서 이미 멀어진 갈릴리 바닷가 그 어느 한적한 길가에서의 동행은 오늘 이 시간 이 땅 구석진 어느 타자의 슬픔 곁에 다시 머물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 낼 것이다.
연약하고 유한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깨어지기 쉬운 우리의 영혼이 이 모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그 길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감추어진 선을 드러내고 발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렇게 연결된 그리스도와의 연대는 다시 세상으로 그 지평을 넓히고 만다. 우리 교회 안에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이 땅 어느 후미진 곳에서 새로이 우리와의 동행을 허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