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의 선교

개신교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역사와 선교를 연결할 때 가장 약한 고리는 중세교회 시대일 것이다. 중세교회의 기간이 언제부터 인지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정치적인 기준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종교적인 것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기준이라면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중세의 시작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종교적인 기준을 함께 고려한다면 중세의 시작은 그레고리 1세의 등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시기가 서로 다른 중세교회의 시기이지만 다른 시기와 달리 공통된 특징이 있다. 수도원이 선교의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유럽의 경우에 수도원의 역할이 두드러졌는데 수도원은 학문적인 훈련을 하는 학교의 역할을 하는 장소인 동시에 경건의 훈련을 하는 종교적 장소였다. 수도원과 선교를 연결할 때 서유럽지역에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6세기의 아일랜드 수도사 콜럼바(Columba, 521-297)이다. 콜럼바는 563년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선교를 떠나 스코틀랜드와 서쪽 아일랜드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스코틀랜드 서쪽 섬 아이오나(Iona)에 아이오나 공동체가 설립되었다. 이 공동체를 통해서 잉글랜드 지역으로는 아이단(Aidan)이, 네덜란드 지역으로는 윌리브로드(Willibroad)가, 유럽대륙으로는 콜럼바누스(Columbanus)가 활동하게 되었다.

또다른 대표적 서유럽 지역 선교사로는 보니페이스(Boniface, 680-754)로 독일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선교 전략은 먼저 상류층에 선교하고 그 후 상류층을 통하여 대중에게 선교하는 방식을 선호하면서도 여성들을 선교 사역에 참여시키는 방식을 취하였다. 즉, 중세시대의 수도원은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상류층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서유럽지역에서 북유럽과 동유럽으로 확산되어 가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수도원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수도원만으로는 선교의 확장이 되지 않았다. 수도원은 새로운 문명의 통로가 되었고, 그것은 그 당시의 정치력을 가지고 있는 왕권과 연계되어 선교의 확장을 일으켰다.

네덜란드 지역으로 선교를 떠난 윌리브로드를 통해 덴마크 지역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이 수도원과 지역 지도자와의 연계였다. 826년에 윌리브로드의 후계자인 안스카(Ansgar, 801-865)에 의해서 스탄디아비아 전역의 선교로 확산되었고, 10세기에는 덴마크의 왕 크누트(Knut)에 이르러서 덴마크 지역에 기독교가 정착되었다. 북유럽의 지역인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는 10세기 후반과 11세기 초반이 되어서야 기독교가 정착되었다.

이때 중요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올라프 1세(Olaf I, 969-1000)이다. 그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스웨덴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 그 결과 스베르커(Svefker) 왕 때에 기독교가 왕성하여졌고 웁살라에 대성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북유럽 선교의 특징은 국왕이 먼저 기독교로 개종하여 “집단 개종”이 많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국왕의 개종은 신하들의 개종으로 이어지고, 다스리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확산되었다.

동유럽의 경우에는 키릴루스(Cyril, 826-869)와 메소디우스(Methodius, c.815-885) 형제가 슬라브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슬라브어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여 그 결과 이들의 선교 사역은 슬라브 언어를 표기할 수 있는 알파벳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서 슬라브 민족은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과 예식을 진행하게 되었고, 기독교가 민족종교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러시아 지역의 선교에 있어서는 현재 러시아와 전쟁 중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 지역에 있던 올가 여왕(Queen Olga)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녀는 955년 복음을 받아들이고 러시아를 기독교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서유럽과 동유럽의 선교는 새로운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수도원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지식을 소화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지역의 왕권을 통해서 복음은 전달되었다. 그 결과는 개인의 신앙보다는 집단 개종이 선교의 흐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향은 아시아를 향한 선교의 흐름에서도 동일한 모습이었다.

아시아권 선교는 네스토리우스파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는 6세기부터 10세기까지 페르시아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며 복음을 증거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단성론을 강조하였고, 그 신학적 경향과 더불어서 정치적 논란이 이단 정죄의 중심에 있었다. 그 근거가 에베소 회의에서 거부된 단성론이 칼케돈 회의를 통해서는 수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동시에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네스토리우스파는 당나라의 문화 포용정책으로 당나라 선교도 적극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당 태종 정관 9년, 다른 말로 635년에 알로펜을 단장으로 하는 21명의 선교사단이 장안에 도착하였고 당 태종은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파사사로 명한 네스토리우스파를 위한 교회를 설립하였다. 즉, 아시안 지역의 선교는 무역이라는 실크로드를 따라 새로운 문물과 지식이 교류됨과 동시에 절대적인 권력의 왕의 정책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리하자면, 중세시대의 한 축인 수도원은 새로운 지식을 다루며 가르치는 학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중세시대에는 현재의 정치 제도와 달라 공동체가 개인의 선택보다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는 새로운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공동체 리더의 결정이 선교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는 현대의 이민자들 공동체 속에서도 발견이 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교육의 장소는 이민자들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담당하고, 뉴질랜드 문화 속에서 교회는 이민자들이 새로운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불어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있어서 핵심이 누구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현대 선교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점이 된다. 각 가정에서의 의사 결정의 중심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부장적인 과거의 가족 의사결정 구조가 현재, 특히 이민 가정 속에서는 의사결정의 구조가 이민의 목적에 연관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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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균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 신대원, 일반대학원 졸업(한국교회사 전공). 오타고대학교 박사(선교학, 이민자 신학, 종교사회학 전공). 파머스톤노스 한마음교회 담임. 알파크루시스 강사. 현지교회와 이민자를 연결하는 꿈을 가지고, 선교와 이민이라는 주제를 다루려 한다. 관심분야는 선교학, 이민자 신학, 한국교회사와 아시아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