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서

얼마 전 친구들과 짧은 만남에서 한 친구가 불쑥 꺼낸 이야기가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다.

“‘나’라는 것은 실재할까? 우리 생명은 육체적으로 단 한 번도 나 스스로 인적이 없었단 말이지. 그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들이 끊임없이 세포 분열을 통해 이루어진 죽어가는 세포와 새롭게 생성되는 세포일 뿐, 단 한 번도 ‘나’ 그 자체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그저 친한 친구들끼리 나누던 세속적 대화들에 낄낄대던 우리는 조금은 엉뚱했던 그 친구의 생명에 대한 근원적 질문 앞에 잠시 동안 말없이 그 다음 이어질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그의 눈을 빤히 쳐다 보고만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사로잡혀서인지 그 친구의 다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임이 끝난 며칠이 지나서도 그가 던진 이 짧은 ‘나’에 대한 화두가 여전히 생생하다.

단 한 번도 오롯이 홀로 ‘나’였던 적 없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그의 궁금증은 어쩌면 그 자체로는 영원히 이해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그저 ‘나’만을 가리키고 있는 존재의 본질이 스스로 실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 자체라는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다만 근원적인 “나 – 너”의 관계 속 ‘나’ 이거나 ‘나 – 그것’의 ‘나’일 뿐이다.”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가 그의 대표작 나와 너(Ich und Du)를 통해 드러낸 <나>의 모습은 결코 나 자신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 자아가 아닌 반드시 다른 누군가와 함께해야만 하는 상대적 자아임을 명확하게 논증해 내고 있다.

어느 한 친구가 던진 생물학적 질문 앞에 인문학적 응대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생뚱맞긴 하지만 그 질문의 본질이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어쩌면 부버가 제시한 ‘나’에 대한 인식은 누구에게나 이해 가능한 응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버는 한 개인의 삶이 오직 상대를 인식할 때만이 비로소 그 이해의 시작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존재를 대상물로 인지하고 소유하는 관계 즉, ‘나-그것’의 관계로는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내가 그 대상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 갈 때 비로소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삶으로 치열하게 참여하지 않는 모든 경험과 그 경험 속의 객체는 비록 그 대상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스쳐 지나며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모든 것이 아마도 그와 같을 것이다.

제3세계 국가의 기아난민, 경쟁상대, 대화하지 않는 이웃 모두는 그렇기에 아마도 이와 같은 관계에 속해 있지 않을까?

하지만 누군가 이 관계하지 않는 모든 바라봄과 소유의 경험 속 대상을 향해 ‘너’라고 부를 때 마침내 그 대상은 물건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것’ 이기를 멈추고 우리에게 실존적 존재로 다가온다. 그렇게 다가온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그제야 우리는 스스로를 희미하게나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나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은 것이고 나와 관계하고 있는 누군가와 갚은 관계 속에 있을 때만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이 남긴 <꽃>이라는 시는 바로 우리의 관계로 결정되는 나의 존재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실존적 자아에 대한 시로 평가받는다.

이렇게 나와 너의 관계로 이루어진 우리 삶의 여정은 우리 인류를 사랑의 본질로 인도한다. ‘너’라고 불리어짐 없는 ‘나’의 존재가 그 의미를 다하지 못하듯 깊은 관계 속 드러나는 인류의 사랑은 사람이 서로에게 작용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하늘의 경험이다.

이 놀라운 경험은 이제 그 ‘너’의 자리에 하나님을 위치하게 함으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 인류는 우리와 근원적으로 관계하고 계신 하나님의 형상 없이 정의될 수 없음을 우리가 인식할 때 비로소 다른 모든 관계 속에서 희미하게 발견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맺어진 하나님과의 신비한 관계의 경험은 단지 그 신비함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너’라고 부르신 ‘나’를 통해 스스로는 물론 이 세상의 의미를 함께 발견하게 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오늘 나는 누구와 만나고 있으며 누구와 관계하고 있을까? 내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비추어 줄 그 관계에, 그 작용에, 그리고 그 사랑에 우리 존재의 근원이 허락하신 빛이 더할 수 있기를…

그래서 “삶에서 가장 참된 것이 만남”이라던 부버의 속삭임이 우리의 삶 가운데 증명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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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익형
레이드로 대학에서 성서연구와 공공신학으로 학부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고, 현재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나눔공동체 낮은마음의 대표 간사로 일하고 있다. 성도와 교회가 함께 섬기고 있는 낮음의 사역 안에서 교회와 세상의 연대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에 비전을 두고 세상의 낮은 곳에서 일함을 즐거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