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大)심문관

20년이 넘게 벼르는 일들이 몇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악령』을 다시 정독하는 일도 그 하나입니다. 방대한 책의 분량도 문제지만 읽을 때마다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점들을 알게 되리라는 예상은 늘 하지만 그 범위와 정도가 수용한계를 넘어서기에 포기하고 덮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럼에도 요즘 새삼스럽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속에 액자처럼 끼어 있는 <대(大)심문관>이라는 서사시로 몇 날 며칠을 보내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인간의 문제이지만, 인간 영혼의 무한한 다양성과 존재론적 의문, 인간의 욕망과 도덕률의 충돌,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 자유의 양면성 등 존재론적이고 철학적인 문제, 그리고 종교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은 “우리에게 신은 무엇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합니다.

100여 년 전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상상도 못 할 발칙한 상상(?)으로 동시대뿐 아니라, 지금까지 인간의 양심을 서늘케 하는 글입니다. 내용은 카라마조프가의 똑똑하지만, 허무적 무신론자인 둘째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가 신앙적으로 순수한 수도사인 동생 알료샤에게 자신이 창작한 서사시를 들려주는 형식입니다.

이 작품 속의 대심문관은 스페인 가톨릭 추기경으로 실제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악명 높은 심문관 토마스 데 토르케마다(1420~1498)가 모델이기도 합니다.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1478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칙서를 받아 설립되었는데, 도미니크파의 수사인 토르케마다는 그 자신이 유대인의 혈통(콘베르소)을 가진 자였음에도 많은 유대인을 이단자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이단자들에 대한 그의 잔혹성은 가히 추종을 불허했다 합니다.

서사시의 무대는 16세기 스페인 세비야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이교도가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워져 가던 종교재판으로 마녀사냥이 한창인 시기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게 된 날은, 대심문관인 추기경의 지휘 아래 활활 타오르는 화형장에서 거의 100명에 가까운 이단자들이 국왕을 비롯하여 대신, 기사, 추기경, 아름다운 궁녀들, 세비야의 수많은 시민 앞에서, 처형을 하고 난 이튿날이었습니다.

1500년 전에 3년 동안 사람들 사이를 왕래할 때와 마찬가지 모습으로 ‘조용히 눈에 뜨이지 않게’ 사람들 틈에 섞여 들지만 이상스럽게도 모두가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립니다. 그리스도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묵묵히 걸어갔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축복하는 그분의 손이 그들 위에 펼쳐질 때마다 혹은 그들의 손이 그분의 옷에 닿기만 해도 치유의 힘은 흘러나왔습니다.

한 늙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었고, 관 속에 누워있는 어느 시민의 일곱 살 외동딸은 “달리다굼”이란 말에 일어나 앉더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방실방실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군중 사이에서는 동요와 절규 그리고 통곡이 극에 달한 바로 그때, 성당 옆 광장을 지나가다 이 현장을 모두 목격한 대심문관은 재림한 그리스도를 알아봤음에도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30살가량 되는 온유한 모습의 청년 그리스도와 온갖 인생 역정을 다 거친 추상같은 90세 노인과의 대면은 그 자체가 강력한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대심문관으로 아흔 살이 넘은 나이에도 꼿꼿한 권위를 잃지 않고 있는 그는 시대의 상징이자 최고의 권력입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므로 기적을 행하고 있는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두도록 하는 명령에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고 막아서지 못합니다.

신약성경의 니고데모처럼 늦은 밤 감옥을 찾은 대심문관은 예수가 사탄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는 내용을 두고 예수를 몰아세웁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굶주린 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데, 첫 번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으로 변하게 해라, 그러면 네 영혼과 육체가 만족과 기쁨을 얻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들에게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라는 요구인 셈이지요.

두 번째 시험은 “성 맨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신비 또는 기적을 제공하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내 발 밑에 무릎을 꿇으면 지상의 모든 왕국과 영광을 주리라!”는 제안입니다. 이것은 권세 즉, 사람들이 경배하도록 만드는 힘을 요구한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인간에게 필요한 세 가지 물질, 신비, 권세를 제공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이러한 것들을 제공했을 때 이런 것들의 지배하에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그것들에 의한 노예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심문관은 “인간의 존재는 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대하지 않소!”, “인간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누리고 향유할 능력이 부족해서 오히려 빵(물질)의 유혹, 기적(신비)을 요구하는 유혹, 그리고 권력에 귀속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고, 또 이것을 거부하기란 인간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대심문관은 자유를 감당하기 어려운 인간들을 위해 악마가 제안한 그 세 가지를 중세의 교회가 사들여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 세계를 통합하고 사람들을 노예화함으로써 인간의 종교전쟁과 정신적 기근 등 자유가 주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고 항변합니다. 비난의 요지는 그리스도가 인간을 잘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여 인간에게 필요한 빵과 기적과 권력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를 박탈하지 않기 위해, 즉 물질적인 억압의 도구로 노예적인 복종을 강요하지 않기 위해 사탄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는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감내한 십자가에서의 나약한 죽음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충분히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런 신적인 기적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자유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대심문관에 의하면, 대부분 인간은 그리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통의 인간은 정신적인 자유보다는 물질적인 빵과 육신의 안락한 행복을 더 원하는데,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고통스러운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소수의 선택받은 강자를 위해 수백만 아니 수천만의 평범한 약자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그리스도에 대한 비난의 요지입니다.

이어 가톨릭교회 추기경으로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며 정당화합니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그들은 대다수의 연약하고 평범한 인간의 편에 섰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연약한 인간들에게 빵과 지상에서의 행복을 제공합니다. 인간들에게 적당히 일을 시키며, 일하지 않는 시간에 오락을 제공하고, 심지어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여지도 허락하면서 적절하게 죄를 사해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인간들에겐 가차 없는 형벌을 내려, 사회를 조직하고 통제하면서 인간을 길들였고, 그 결과 대다수의 인간은 적절한 자유를 담보로 행복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비밀은 “그렇소! 우리는 당신과 손잡는 대신 과감하게 그 악마와 손을 잡고 있소. 이것이 우리들의 비밀인 셈이지”하는 고백처럼, 반 그리스도적인 역사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에게서 빵을 받으면서 우리가 그들의 빵을, 그것도 바로 그들 자신의 손으로 획득한 빵을 그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가져간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그들은 빵 자체보다는 그 빵을 우리의 손에서 받고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 날뛸 것이다!”라 자기변호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재림하여 이렇게 만들어 놓은 질서를 무너뜨린다면 지상은 다시 지옥이 될 것이기에 대심문관은 예수를 화형 시키겠다고 선언합니다.

“당신(그리스도)은 어째서 우릴 방해하러 온 거요? 난 내일 형을 선고해서 가장 사악한 이교도로서 당신을 화형에 처할 것이오. 다시 말해 두지만, 내일이면 당신은 순종하는 양 떼들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은 내 손짓 하나로 당신을 불태울 화형대 속에 불타는 장작을 던져 넣을 것이오. 나는 내일 당신을 화형에 처하겠소. 이것으로 할 말은 다 했소”.

놀라운 점은 그리스도의 반응입니다. 대심문관의 독기 어린 비난과 열정적인 자기변호에 대한 그리스도의 반응은 긴 침묵과 짧은 입맞춤입니다.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순한 눈으로 대심문관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의 긴 열변을 들은 후에, 그리스도는 대심문관에게 조용히 다가와 입맞춤을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 입맞춤하는 러시아 정교의 문화적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입맞춤은 다양한 해석을 의미합니다. 이는 대심문관에 대한 그리스도의 인정으로, 그의 정당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 조건 없는 아가페의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의 입맞춤은 연민(compassion)의 행위입니다. 연민은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행위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마음에서 용서가 나옵니다. 이것은 승자가 베푸는 아량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연민의 근원은 자비입니다. 자비는 어머니의 사랑, 여성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연약한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며,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무한한 사랑을 뜻합니다.

용서하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어머니가 연약한 자녀를 바라보는 눈길 같습니다. 그럼에도 대심문관은 자신이 평생 진리라고 붙잡고 헌신해 온 적당한 물질과 신비와 권위의 힘으로 유지되는 교회의 시스템을 버리지 못합니다.

1500년 전 그리스도의 역할을 다하고 떠난 후 지상에서 그 모든 역할은 이제 추기경, 교황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시키면서 그러니 더 이상 우리의 사업을 방해하지 말고 떠나라고 예수를 쫓아내며 끝이 납니다.

“자, 어서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시오… 두 번 다시… 절대로! 절대!”

출처: 김용규,『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 문명 이야기』(IVP 출판사, 2021)을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을 통해 책에서 다뤄지는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필자의 관점에서 재 인용과 재 해석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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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