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계의 유익

잠언 12: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Whoever loves discipline loves knowledge, but he who hates correction is stupid.

주변에 쓴 소리 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듣기에는 쓰고 거북하지만 몸에 좋은 보약과 같은 말을 해주는 사람 말이다.

이러한 훈육은 가장 기본적으로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일어난다. 부모는 훈육을 통해 자녀들에게 바른 행동규범과 가치관, 책임감을 가르쳐야 한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판단과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몫이다.

훈계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과거 부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을 훈계하고 잡아준 것은 스승이었다. 과거에 비해 그 비중이 크게 줄었지만 지금도 스승의 훈계는 제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33년간 일본 최고의 인재들을 키워낸 존경받는 교수 이토 모토시게는 정년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32가지 쓴 소리를 책으로 만들었다.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 냉철하고 현실적인 쓴 소리로 청년들이 긴 불황과 어둠의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훈계하는 책이다.

이런 책들은 느슨해지거나 나태해진 정신을 흔들어 깨우고 다시금 용기 있게 도전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그것이 쓴 소리의 효능이다.

물론 쓴 소리를 들으면 당장은 마음이 아프다.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마음속을 휘젓는다. 상처로 남을 수도 있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특히나 시대가 개인의 감정을 과잉보호하고 있기에 쓴 소리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좋은 소리, 달콤한 소리,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소리가 창궐하고, 쓴 소리도 부드럽게 해야 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오늘 잠언은 쓴 소리의 중요성을 교훈하고 있다.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혼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복이다. 인간은 훈계를 통해 사람됨을 배운다. 이 훈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운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는 말은 곧 징계가 없으면 사람은 짐승과 같이 자기중심적이고 본능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엔 적절한 훈계와 징계를 해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면 쓴 소리 들을 일이 적어진다. 그래서 부모와 스승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에서 쓴 소리가 사라지면 자신 또한 정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적절하고 바른 훈계는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그 연약함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새로운 깨달음과 지혜의 지평을 열어준다. 옳은 선택을 내리도록 지혜를 제공하고 성장하고 성공한 삶으로 인도한다. 잠깐의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역할을 친히 감당해 주신다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이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12:5-6)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훈계를 좋아하게 되기를 바란다. 양심을 통해 권면하실 때 즐거이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실 때 낙심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주의 훈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성도 되기를 기원한다

믿음으로 견디기
시편 12: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Help, LORD, for the godly are no more; the faithful have vanished from among men.

그리스도인의 수는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의 성도 수는 전체 인구의 25% 정도로 파악됐다. 현재는 20%에 못 미치고 있으며 하락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

뉴질랜드의 하락세는 훨씬 더 심하다. 20년 만에 60%를 웃돌았던 성도의 수가 30%로 반 토막 났다. 반면, 무슬림의 수와 무신론자를 포함한 무교의 수는 가파른 상승 선을 그리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하락세는 주로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앙아시아, 남미, 아프리카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고 있는 국가도 많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성도 수나 영향력은 점차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현시대만의 일은 아니다. 무려 3,000년 전의 인물인 다윗도 동일한 현상에 목격했다.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줄어드는 현상을 보고 한탄했다. 거짓과 교만과 비열함이 날뛰는 사회를 보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다윗 외의 여러 시편 기자와 선지자들 또한 동일한 기록을 남겼으며 그 중 엘리야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가 본인밖에 없는 것 같은 외로움을 고백하기도 했다.

이처럼 절망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회개와 부흥을 구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으로 이 압박을 견뎌내야 한다. 거짓과 유혹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동요하지 말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이미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음으로 연단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 견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참되고 살아있으며 진실함을 증명할 수 있다. 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비결은 가장 강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연단을 견뎌낼 인내를 제공한다. 헛된 길을 버리고 경건과 충심으로 인도한다. 주의 말씀은 수천 년의 풍파와 불 시험을 견디고 지금까지 견고하게 살아있다.

말씀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 말씀을 붙드는 인생도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가장 순결하고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대 가운데 경건하고 충실한 백성으로 살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