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적 이민자 예수

지난 2회에 걸쳐 신약성서 안에 나오는 선교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를 어떻게 이야기하셨는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다루었고, 서신서들과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떤 선교적 개념이 나오고 있는지 이야기하였다.

이를 통해서 분명한 것은 신약성서에서 선교적 개념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약성서 안에서 “이민”에 대한 내용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 이민학과 선교학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이민의 관점으로 신약성서를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에 강연이나 설교하러 갔을 때 이민자의 시각으로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민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면 많은 성도들이 아브라함으로 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민자는 아브라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필자는 이민과 접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적 이민자 예수(Incarnational Migrant Jesus)”로 묘사한다. 특히 성육신적 이민자 예수를 잘 표현하고 있는 성경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 1장은 이민자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요한복음 1장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함께 하셨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성육신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9절의 말씀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가 참 빛으로 이 땅으로 이민을 왔고, 그 이민의 여정은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온 이민자들처럼 주변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만 왕의 왕이 변방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도 아닌, 왕의 자녀도 아닌,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철저한 주변인으로 이 세상에 온 사건이 성육신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가 성육신을 통해 이 땅의 거주민들을 만나는 모습은 이민자들이 새로운 땅으로 도착하였을 때의 모습과 동일하다.

이민자들에게 제일 먼저 앞을 가로막는 것이 언어 장벽이고, 그 언어 장벽은 문화 장벽으로 확장되어진다. 그로 인해서 이민자들은 이주지에서 주변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이민자 예수도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장벽으로 이 땅에 사는 거류민들 사이에서 주변인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신의 언어였던 예수가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온 사건이 성육신의 사건이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라고 성육신을 이야기한다.

과연 육신의 옷을 입은 신의 언어를 피조물인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인간은 신의 언어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이 신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이 신이 되는 것과 동일해지는 것이고, 그 한계가 드러난 사건이 아담과 하와의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사건이다.

아담과 하와는 결국 신이 될 수 없었고, 이것이 신이 될 수 없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이다. 다른 말로, 이 땅에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성육신한 신의 언어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며, 신의 언어를 사용하는 예수를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어 배척하게 되는 것이 이민자들이 경험하는 새로운 땅에 도착하여 경험하게 되는 언어의 장벽이다.

더불어 성육신적 이민자인 예수는 단순하게 언어적 장벽을 통한 어려움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미 성육신이라는 개념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없는 상황에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있는 현실 속으로 이주해 온 것이기에 성육신은 시작부터 넓은 의미에서 이민이 된다.

또한 예수는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난민의 삶을 살아감으로 강제 이주의 표본이 되었다. 극단적인 정치적 억압을 통해 태어난 베들레헴을 떠나 강제로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는 역이민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애굽에서 나사렛으로 이동은 역이민의 삶인 동시에 역차별의 삶을 보여준다. 이민학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들 가운데 전에 잠시 언급하였지만 역이민도 중요한 주제이다.

이민 1 세대와 1.5 세대들이 이민의 상황이 바뀜에 따라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역이민이다. 역이민 속에서는 단순히 고향 땅으로 돌아감으로 언어가 동일하고 문화가 동일한 곳에서 주변인을 벗어나는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이민 속에는 바뀐 문화 속에서 또다른 문화충격을 받게 된다. 이것은 예수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역이민 속에서 역차별이 존재함이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다.

신약성서 속의 이민자를 이해하는 것, 그것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이면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사건이 바로 이민의 사건이고, 인류의 구원은 신의 이민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신의 이민은 신약성서 속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다음 호에는 신약성서는 이미 다문화(cross-culture)로 표현되는 이민의 열매로서 기록되어 있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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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균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 신대원, 일반대학원 졸업(한국교회사 전공). 오타고대학교 박사(선교학, 이민자 신학, 종교사회학 전공). 파머스톤노스 한마음교회 담임. 알파크루시스 강사. 현지교회와 이민자를 연결하는 꿈을 가지고, 선교와 이민이라는 주제를 다루려 한다. 관심분야는 선교학, 이민자 신학, 한국교회사와 아시아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