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1:4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Wealth is worthless in the day of wrath, but righteousness delivers from death.”
현재 우리는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천재지변과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의 소식은 세계 곳곳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수년간 전 세계를 공포 속에서 마비시켰던 전염병은 언제든 다시 활개 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처럼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국제정세는 한 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우며, 물가 상승률, 실업률, 고령화 등 사회경제적 문제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정(security)을 찾게 된다. 안정을 찾는 가장 원초적인 방법은 재물을 쌓는 것이다. 재물이 안정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재물이 안정을 보장한다는 말은 사실일까? 틀린 말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많다. 돈이 있으면 안전을 선점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다.
2021년 미국 텍사스주에 역대 최대 한파가 몰아쳤다. 수도가 얼고 전기공급이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다. 인명피해가 발생할 정도로 사태는 심각했다. 그와 같은 갑작스럽고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재물은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오늘 잠언에선,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재물이 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텍사스를 강타한 한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주님의 진노 앞에서 현금은 얇은 플라스틱이고 통장 잔고는 화면에 표기된 숫자에 불과하다. 주식, 부동산 기타 모든 소유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경제활동을 중단하고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계속해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재물이 하나님의 진노의 때에는 무익할 수 있으나 그전까지는 유익하기 때문이다. 오늘 잠언은 재물의 무익함과 동시에 유익함도 가르쳐주고 있다.
지혜자는 공의를 위해 재물을 사용한다면 타인과 자신을 죽음에서 건질 수 있다고 교훈한다.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 그리고 선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재물에는 영원한 의미가 부여될 것이다.
24과 25절을 보면 재물로 공의를 세우는 하나의 방법을 소개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보여준다. 그 방법은 바로 구제다. 구제를 통해 이웃을 풍족하게 하는 자는 자신도 윤택해질 것이라 말한다.
이 땅에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구제하는 일에 사용한다면 이 땅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풍성하고 윤택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지혜자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통해 공의를 세우고 그 공의로 인해 주어지는 풍족함과 윤택함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나아가 마지막 때에 생명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기원한다.
시편 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함은 어찌함인가?”
“In the LORD I take refuge. How then can you say to me: “Flee like a bird to your mountain.”
사냥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온 인류의 생계 수단 중 하나이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로는 생계의 수단보다는 하나의 스포츠로 변모했다. 규정이 많고 까다로워서 대중적인 스포츠로 발돋움하진 못했지만, 사냥이 주는 특유의 긴장감과 성취감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냥을 하는 사람의 입장이다. 사냥을 당하는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공포스럽고 끔찍한 일인가? 슬프게도, 과거 유럽인들은 비유럽인들을 상대로 인간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불과 200년 전만 해도 호주에서는 원주민 사냥이 합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잔혹한 일들이 오지에서는 지금까지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사냥감이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그가 사냥꾼의 목표가 된 연유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피난처 삼은 것에 대해 비난과 조롱을 받고 있다. 대적은 그에게 ‘네 산, 곧 여호와의 성전으로 도망하라’ 비웃으며 외친다.
이에 기자는 마치 사슴처럼 아무런 대항도 못 하고 울부짖으며 도망만 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간절하고 끈질긴 믿음은 기자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한다.
기자는 악인들의 뒤에서 그들을 사냥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한다. 폭력을 행하는 이들에게 그물을 던지시는 하나님을 목격한다. 하늘 보좌에서 불꽃 같은 눈으로 인생을 감찰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을 대면한다.
이 시편의 내용과 비슷한 일이 유다왕 히스기야에게 일어났었다. 강대국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였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랍사게 장군을 보내어 히스기야와 그의 믿음을 조롱하며 백성들에게 투항할 것을 명한다.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고 그가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고 외친다. 이에 히스기야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신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치셨다.
하나님의 대적자들은 성도인 우리를 먹잇감으로 여긴다. 활시위를 당기며 우리를 조준한다. 사도 베드로의 표현처럼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 한다.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양심을 노린다. 위협과 공격, 조롱과 협박을 받으며 궁지에 몰리기도 한다.
바로 그때,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봐야 한다. 보통 사람은 위험을 감지하면 사람은 눈을 감지만 믿음의 사람은 눈을 더욱 크게 뜬다. 불 말과 불 병거, 그리고 하늘의 천군 천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응시해야 한다. 대적의 뒤에서 심판의 그물을 던지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조롱과 핍박에도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길 바란다. 최후의 승리를 주실 때까지 이기고 견디는 충성스러운 믿음의 백성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