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합격을 하고 딸도 합격을 하니 여기저기서 축하의 인사를 받는다. 그런데 축하 인사 중에 제일 행복한 인사말이 바로 ‘열매’라는 말이다.
어려웠지만 힘들었지만 복음의 긴박성을 가지고 목회를 해 왔던 그 수고의 열매. 그간 강조해 왔던 약속의 말씀들이 꽃을 피우며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 되심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그 열매라는 말이 참 좋다.
어려운 대학교에 합격했기 때문에 얻는 열매가 아니다.
나는 그 합격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무엇이 진정한 합격인지를 말해 주고 싶을 뿐이다. 합격은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이제 나도, 그리고 우리 자녀들도 종점에서의 합격을 꿈꾼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우리 자녀들이 앞으로는 더욱더 믿음을 지키기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의 유혹은 더욱 더 많아진다. 이제는 죄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정한다.
세상의 가치가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기도 한다.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 20:4)
우상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들어 낸 가짜 신이다.
그렇기에 철저히 우상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하고, 내 자식이 합격해야 하고 성공해야 하니 나를 도우라고 기도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실수를 한다.
나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길 원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다. 나의 좌우명 가운데 하나는 ‘주 안에서 손해 보고 주 안에서 바보 되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손해 보고 바보 되면 그 자체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안에서 손해 보고 바보가 되면 하나님은 그 이상으로 채우시며 높이신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믿음으로 자녀들을 양육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열매 맺게 해 주신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눅 6:44)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이 있다. 바로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안(in God)에 있고,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과 동행(with God)하며, 하나님의 영광을(for God)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기도 제목이 없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왜 교회를 떠나가는가!
주변에 계신 목사님이 한국 집회를 하고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집회하신 교회의 성도 수가 5천 명이 넘는데 청년들은 100명도 안된다고 하셨다.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너무 무겁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준다. 주일 학교가 없고, 중·고등부가 없고, 청년부들이 다 사라지고 없다.
부모들이 세상 가치관에 신앙을 다 팔아 버린 결과이다.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진 부모 때문에 세상 안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in God) 있어야 구원을 얻듯, 하나님 안에 있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성령의 능력을 입게 된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하나님과 동행(with God)하는 삶은 어떤가? 요셉은 형들로 말미암아 노예로 끌려가고 또 거룩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모함을 받아 감옥에 끌려갔다. 요셉은 노예가 되고 또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성경은 그를 형통한 자로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2)
하나님이 함께하는 그 자체가 바로 형통이다. 내 자녀가 형통하길 원하는가? 내 자녀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한 자는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형통한 자이다.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이 형통이 아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총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한 사람 중에 한국 사람들의 자퇴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직 삶의 목표를 하버드대학교 ‘입학’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입학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었으니 그 목적을 이룬 이후의 삶은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삶의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for God)을 올려 드리는 삶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In God.’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항상 하나님 안에서 거하기를 기도한다.
‘With God.’
우리 자녀들이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길 기도한다.
‘For God.’
우리 자녀들이 평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