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0:22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The blessing of the LORD brings wealth, and he adds no trouble to it.”
누구나 여유로운 삶을 사모한다. 일에 쫓기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가지고 싶은 것을 사며,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그런 인생 말이다. 이처럼 자유롭고 여유로운 인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몇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가장 일반적이며 상식적인 답은 돈이다. 사람은 돈이 있어야 자유와 여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평생 놀고먹을 만큼의 자산을 소유하기만 하면 참된 자유와 여유를 얻을 수 있을까? 외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부자의 고질적인 문제는 근심과 염려다. 많이 가질수록 잃을 것이 많기에 근심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신경 쓰고 지키며 보호해야 할 것이 많으니 당연한 일이다. 부유해질수록 선택의 무게는 증가하고 더 큰 책임이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 솔로몬의 잠언을 보면, 근심이 동반되지 않는 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두 종류의 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는 Rich고 또 다른 하나는 Wealth이다.
금융전문가 James Bogart는 이 둘의 차이를 빚(Debt)의 유무 또는 크기 여부로 설명했다. 빚이 없는 상태에서 부유한 사람은 Wealthy에 속하고 자산은 많지만 빚으로 인해 순이익이 낮은 사람은 Rich에 속한다고 말했다.
반면 기업가 로버트 기요사키는 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The rich have lots of money but the wealthy don’t worry about money.” 이는 그가 소년 시절 아버지에게 들은 대답이었다. 참으로 지혜로운 답이다. 그 지혜는 아마 오늘 잠언 말씀에서 왔을 것이다.
지혜자에 의하면 하나님의 복은 사람을 부하게(wealthy)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않으신다. 구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 복 받은 이들은 대부분 큰 부호가 됐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욥이 그랬다. 이들이 성실히 일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개입과 특별한 방법을 통해 부를 얻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고 내준 아비멜렉 왕에게 소와 양과 은과 땅을 얻었다. 이삭은 심은 것의 100배나 되는 소출을 얻고, 당시 유전과 같이 귀했던 우물을 파는 족족 찾아냈다. 야곱은 흥미로운 방법으로 삼촌 라반의 가축들은 자신의 소유로 얻었다. 욥은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었으나 하나님께서 갑절로 갚아 주셨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근심이 없었을까?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아들이 없었고, 이삭은 사랑하는 아들 에서가 늘 근심거리였고, 야곱은 어리석은 아들들로 인해 근심했다.
욥의 고난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들의 부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 아니다. 그들의 소유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오늘 말씀의 강조점이 근심 없는 재물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본문의 핵심은 근심거리를 제하여 주시는 분이 누구냐에 있다. 우리의 근심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아브라함에겐 상속자를, 이삭에겐 에서와 야곱의 화해를, 요셉에겐 가족의 화평을, 그리고 욥에게는 건강과 부의 회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만이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근심을 잠재우고 불태우실 수 있다.
빌립보서 4장 6절-7절을 기억하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께서 모든 독자에게 복 내려 주시기를 원한다. 그 복으로 말미암아 물질뿐 아니라 영적으로, 지적으로, 관계적으로 부유하고 풍성해지길 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근심을 제하여 주시기를 축원한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
시편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Why, O LORD, do you stand far off? Why do you hide yourself in times of trouble?”
전 세계 어디를 가나 통하는 놀이가 있다. 바로 숨바꼭질이다. 어린이들은 숨고 찾을 때 느껴지는 긴장감을 즐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조여오는 긴장감이 버겁고 숨은 사람 찾는 일은 귀찮아진다. 해서 어른이 되어 숨바꼭질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렇지만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숨을 때가 있다. 위험을 피하고자 숨기도 하고 쑥스러워서 숨기도 한다. 비밀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숨기도 하고 세상의 화려함이 지겨워 자연 속에 숨기도 한다. 이처럼 이유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숨는 행위 자체는 떳떳하지 못하고 비겁한 행위로 여겨진다.
본 시편의 기자는 숨어 계신 하나님을 찾고 있다.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무소부재(Omnipresent)하신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고 자극하는 듯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주를 부르고 있다. 기자는 자신의 어려운 상황과 불의로 가득한 현실에 대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며 그가 숨어 있다고 묘사한다.
하나님을 마치 방관자요 비겁한 존재로 몰아세우고 있다. 원인 모를 극심한 고난을 경험한 욥, 나라를 빼앗기는 것을 목격한 예레미야,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같은 고백을 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때로 우리도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고, 기다려도 변화가 없는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을 마주한다.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냐?”는 질문이 터져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는, 숨으시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그 기간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면 이전엔 몰랐던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을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침묵은 더 깊은 영적인 샘물을 팔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의 침묵은 내 믿음의 크기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침묵은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도록 도와준다. 그 침묵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더 깊고 성숙한 관계로 초대하시며 더 풍요롭고 높은 곳으로 인도하신다.
영적인 어둠의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God is nowhere)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가? 현실에 대한 눈을 잠시 감고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에 집중해 보라.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God is now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