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에게 사망선고를 내리다

강창호 목사<영원한비전교회>

‘사망’은 모든 걸 굴복시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이 실체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특히 사람은 이것을 무서워합니다. 스스로 이겨낼 재간이나 수단이 없습니다. 강하게 보이는 사람도, 인간은 모두 양의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실제 죽음 앞에서는 서로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다만 두려움을 밖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다르거나 애써 공포를 감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라는 책을 쓴 박효진 장로는 오랫동안 교도관으로 근무하며 사형 집행 현장을 많이 봤습니다. 악한 범죄를 저질러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앞둔 이들은 ‘죽음’이란 말을 가장 싫어하고, 죽음이 너무 겁나서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피합니다. 재소자들도 그들 앞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의 간증에 의하면, 사형수는 교도관의 발걸음 소리에 민감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낯선 소리가 들리고 인원이 평소보다 많은 교도관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 죽음을 직감합니다. 사형 집행을 통보 받는 순간, 어떤 사형수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하고, 어떤 이는 교도관의 부축을 받으면서 걷는 중에 바지에 오줌을 눕니다. 몇몇 사형수는 발을 질질 끌다시피 걷다가 ‘엄마아~ 엄마아!’하고 목이 터지라고 부르짖습니다.

집행장까지 보통 걸음으로 몇 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느린 걸음으로 걷습니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어서입니다. 어떤 사형수는 걷는 중 신고 있던 신발을 일부러 벗어지게 만들어 놓고는, 한참을 걷다가 함께 걷는 교도관에게 말합니다. “저 신발 벗어졌어요.” 그리고 돌아서서 신발을 찾아 신습니다. 신발을 핑계로 그 시간만큼 죽음과의 만남을 늦춰보려는 의도였습니다. 처절합니다.

이들은 피해자를 벌벌 떨게 했던, 강하고 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죽음을 직면하면 그 대담함은 어디에도 없고 약한 모습만 보입니다. 죽음이라는 실체를 바로 눈앞에 마주친, 두려움 많은 양의 속성을 가진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그럼,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안전일까요? 다윗이 목자로 고백했던 바로 그 인격,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이 해답입니다.

죽음은 아주 힘이 세다
십자가 사건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햇빛이나 공기가 너무 흔해서 그 소중한 가치를 잊고 지내듯 우리는 ‘십자가’라는 말을 당연하게 여기곤 합니다. 공기가 희박해지는 공간에 갇힌 사람에게 호흡에 필요한 산소는 그의 전부가 됩니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고 지내던 공기라는 물질이 갑자기 지극히 중요해집니다. 십자가는 위대하고, 강력하고, 장엄한 사건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거듭해서 알아가야 하고, 거듭해서 매료되고, 거듭해서 우리의 무릎을 꿇어야 하는, 엄청난 단위의 진실입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떠한 영원을 맞이하게 될지가 결정됩니다.

영적 깊이가 있는 책을 써서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앤드류 머레이(Andew Murray)는 그의 저서 “겸손(Humility)”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극한 겸손입니다. 이 신적 겸손에서 우리의 안전이 나옵니다. 두려움 많은 양은 여기서 안심합니다. 골짜기를 지나면서 바라보는 사망이 더는 무서운 세력으로 압도하지 못합니다. 양의 안전과 필요를 위해 온전하게 헌신하신 목자께서 십자가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처형당하신 금요일 아침으로 가보겠습니다.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마27:45)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지금은 세 시간이 지난 정오 12시(제육시)입니다. 한국이든지, 뉴질랜드든지, 이스라엘 땅이든지 12시는 태양이 가장 밝게 비추는 시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후, 시간이 흘러 12시가 되었을 때, 갑작스러운 어둠이 그 지역을 덮습니다. 아주 환해야 할 그 시각에 침범하듯이 흑암이 깔린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진행된 그 날, 주님을 둘러싸고 일어난 현상과 행위 하나하나에는 깊은 의미가 배여 있으며, 이것은 양의 본성을 가진 우리의 필요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The Great Exchange(위대한 교환)”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왜 주님께서 채찍 맞으셨을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선지자 이사야는 채찍 맞으심이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질병 치유를 위해서라고 미리 밝혀놓은 바 있습니다.

주님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당시 유대인들의 통용어였던 이 아람어 말을 옮기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뜻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버림을 받아야 했을까요. 그분이 버림당함을 경험하심으로 버림당한 상태의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며(요일2:2),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값으로 우리가 흘려야 할 피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히9:22). 주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부요함을 경험하며(고후8:9), 예수님이 사망을 당하심으로 사망 대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롬6:23).

그렇다면 십자가 처형 현장을 덮은 이 무서운 어둠은 무엇일까요. 신학자 데이비드 갈런드David E. Garland 박사는 누가복음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둠 속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이제 어둠 속에 잠기신다.”

영원한 안전이 확보되다
어둠은 세 시간 동안 지속됩니다. 정오와 오후 3시 사이에 다른 정황은 보이지 않고 오직 어둠만 가득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아들은 죄 덩어리가 됩니다. 물이 스펀지에 스미듯이 헤아릴 수 없는 인류의 죄가 달라붙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소개했던 그분께서 인류의 죄를 한 몸에 받으셨던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고후5:21)입니다.

새하얀 캔버스 위에 검은 잉크를 뿌리고 또 뿌려, 끝에 가서는 표면이 새카맣게 변하듯이 그분의 전부는 사람이 지은 모든 죄로 덮였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할 버림을 영원한 아들께서 대신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뭉쳐진 아들을 버리십니다. 이때,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맹수처럼 사망의 세력이 죄로 안과 밖을 뒤덮고 있는 한 존재를 보고 덮칩니다.

이제까지 아들은 아버지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의 저주를 짊어진 순간 아버지로부터 외면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끊깁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외침은 원래 우리가 내질러야 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창조주와 영원히 분리되어 지옥에 떨어질 때, 사람은 거대한 공포와 헤아릴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것이며, 이때 숨이 끊어지듯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가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면서 우리가 느껴야 했던 위험과 공포를 느끼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육신成肉身하신 아들의 죽음만이 사람을 붙잡고 있는 죽음의 세력이 파괴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죽을 수 없는 신적 존재인 아들을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게 하시고,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아들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사랑이며, 이것이 안전입니다.

주께서 죽음을 그분의 몸으로 받으셨으므로, 더는 죽음이 일으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양을 닮아서 본능적으로 죽음이 두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는 죽음보다 더 강하며 십자가로 영원한 안전이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