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죽음이 휘몰아 치다

그날은 그저 보통의 여느 날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일상의 바쁜 아침이 그렇듯 아이들과의 짧은 실랑이에 조금은 언짢았을 것이며 분주한 마음에 들어선 고속도로의 정체에 살짝 짜증도 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싱그러운 안개비와 차 안에서 들려오는 김광석이면 난 여전히 그런 아침을 즐거워했을지 모른다. 아무 다를 것 없이 조금은 바쁘지만 나름 여유를 찾아가는 그런 아침이 그날도 지나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마을 입구엔 어김없이 마리 할머니가 주차장 옆 의자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밖을 응시하고 있었고, 케니 아저씨는 어김없이 주차할 곳을 고르느라 서성이는 내 차로 다가와 나를 맞는다.

그 마을에서 맞이한 첫 겨울의 어느 날, 죽음은 그렇게 평범히 그리고 너무도 조용하게 찾아오고 있었다.

지금은 정부의 주거시설에 대한 새로운 기준과 정책으로 목재로 만든 작은 캐빈이 제공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 캐빈들이 서 있던 자리엔 그보다 더 비좁고 허름한 이동식 캐라반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나무로 지어진 캐빈은 크기의 문제만 제외하면 그럭저럭 한겨울의 추위를 버틸 간이숙소가 되고 있지만, 오래되어 낡은 캐라반은 덧대어 이어진 철판의 이음새마다 구멍이 뚫려 비 많은 오클랜드의 겨울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낡고 헤어진 캐라반의 양철 표면은 어김없이 그 주인의 외투만큼이나 후들거렸고, 비라도 세차게 내릴라치면 양철을 때리는 빗소리에 고함을 지르지 않고는 어지간한 대화는 불가능했다.

“에이든, 오늘 아침은 기도가 필요해.”

어느덧 운전석 앞까지 걸어온 케니 아저씨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여전히 술에 취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눌하지 않았으며 그의 눈빛은 흔들려 슬퍼 보였지만 빛나고 있었다.

“??”
“너 목사잖아. 네가 토니를 위해 기도해 줘야 할 거 같아.”

그날 아침 한 생명이 스러졌다. 이틀 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너무도 무심한 일상의 인사를 나눈 토니는 내가 맞이한 그 아침의 싱그러움을 맞이하지 못했다.
이 마을에서 사역을 시작하며 누군가의 죽음 앞에 마주 서 있게 될 나 자신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와 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케니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그의 작은 처소에는 수년간 세탁되지 못한 듯 곰팡이가 피어 새카매진 이불에 그가 덮여 있었다. 변변히 허리조차 펼 수 없는 작은 공간에 누여진 그의 몸을 더듬어 발견한 그의 발은 너무 거칠었고 검게 변해 있었다.

그의 발등을 부여잡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손을 통해 그가 경험했던 이 땅의 고난들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케니에게 부탁해 젖은 수건을 준비해 그의 발에 묻은 흙을 조심스레 닦아냈다.

그의 마지막을 위해 기도하며 나는 차라리 고통으로부터 이제 자유로워진 그의 영혼이 축복되다 생각했다. 이 땅의 시간은 비록 무언가에 끊임없이 얽매였었더라도 이제부터는 자유로워지기를, 눌리었던 고통의 무게를 벗고 가볍게 날아오르기를 나는 간구했다.

나는 그 시간 드려진 나의 기도가 떠나보내는 한 생명에 대한 위로와 추모의 기도였는지 아니면 그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마친 그의 새로운 시간에 대한 축복의 기도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믿음이 이 세상의 축복에만 머물러 있지 않음에 감사했다.

굳어진 그의 발등에 손을 떼고 돌아서니 좁은 캐라반에 함께 들어오지 못한 몇몇의 이웃이 함께 기도를 마치고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생명의 마지막은 그렇게 그들 사이에서 추모되었고 그렇게 다시 주변인들에게 잊혀 갔다.

이제 그의 몸은 부검을 거쳐 남아있는 가족이 없을 시 변변한 장례조차 없이 무연고로 처리되어 뿌려질 것이다. 이렇게 그 겨울의 초입에 조우한 죽음은 그 계절이 끝나기까지 3개월 남짓의 시간 동안 4번이나 더 나를 찾아왔다

그해 겨울, 난 내가 살아온 시간 동안 경험한 죽음보다 더 많은 죽음을 보아야 했다.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가난은 죽음에 너무도 취약했고, 삶의 모든 영역에 고통으로 자리잡은 빈곤은 그렇게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막을 고할 수 있었다. 그 작은 공간 속에서 가난에 지쳐가는 그들의 시간은 여간해선 스스로의 회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 기다리는 죽음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시간에 담담하게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케니의 작은 캐라반에서 토니의 사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가장 잘 보이는 입구 한쪽에 액자도 없이 걸린 그의 사진은 지금도 그렇게 위로받고 있었다.

*본 글은 재 기고된 글이며,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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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익형
레이드로 대학에서 성서연구와 공공신학으로 학부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고, 현재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나눔공동체 낮은마음의 대표 간사로 일하고 있다. 성도와 교회가 함께 섬기고 있는 낮음의 사역 안에서 교회와 세상의 연대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에 비전을 두고 세상의 낮은 곳에서 일함을 즐거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