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언어로 전도서 읽기

상대방이 전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알아듣지 못하면 엉뚱한 해석을 한다. 그것은 단지 언어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영화 등도 그렇다. 전도서를 지배하는 주된 사상에 대해 학자들은 허무주의, 쾌락주의, 세속주의 등 다양한 주장을 펴왔다. 사실 전도서에 이러한 요소들이 발견되며 미묘한 감정과 관점의 변화에 주의하지 않을 경우 코헬렛의 언어 표현들은 그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코헬렛이 무려 38회나 사용하여 주제처럼 보이는 ‘헛되다’는 전도서의 처음과 끝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바람을 잡으려는 것’, ‘~보다 뛰어남이 없는 것’ , 그리고 ‘모든 수고가 무익한 것’ 등으로 표현되어 전도서 전반에 걸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표현들을 코헬렛의 근본 사상으로 결론 내리는 것에는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욥기를 비롯한 탄식 시와 같은 여러 시편과 선지서에서 회의와 비탄과 절망이 표현되지만 부정적인 그 자체로 끝나는 예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는 말씀처럼 주님은 모든 구약 성경을 가지고 메시아에 관한 일로 설명하셨다. 따라서 전도서는 신약에 직접 인용되지 않았음에도,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12:8). 왜 모든 것이 전부 다 헛된 것이 되었는가? 이는‘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에게서 나오는 착한 일을 포함한 모든 삶이 다 헛된 것이 되었다.

로마서는 이를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롬 8:20a) 했다고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허무한 데’가 70인 역으로 번역된 ‘헛되다’의 ‘하벨’이다. 이는 코헬렛과 바울 사도 사이에 모든 것이 ‘헛되다’는 일체감을 서로 가지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바울 사도는 피조물이 변화하여 죄로부터 회복을 의미하는 영광의 자유를 바라본다.

더 나아가 코헬렛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힘쓰는 모든 것이 다 헛되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닌 하늘의 일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위의 것을 찾음
두 번째로 코헬렛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29번 사용한‘해 아래’이다. 이 말은 헛됨, 허무한 것이 미치는 범위를 의미한다. 즉, 해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다 헛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헛됨에서 벗어나 헛되지 않은 삶을 살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아주 간단하게 ‘해 위에’ 삶을 살면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말씀처럼 해 아래의 세상에서 눈을 떼어해 위의 것을 찾으면 된다.

그리스도인은 ‘해 위’ 세상의 시민권자들로, ‘해 아래’에서는 나그네요, 이방인이다. 출애굽기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나그네와 이방인과 같은 광야의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심지어 해가 있는 그 하늘은 없어질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삶 현재에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구름 기둥이 가면 가고, 구름 기둥이 머물면 텐트를 치고, 또 구름 기둥이 가면 가고, 구름 기둥이 서면 머물러야 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아주 낯선 존재이다.

새로운 피조물
코헬렛의 또 다른 주장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9b~10)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해 아래는 새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것이 생겼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3~24).

해 아래 있는 허무한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는 반복의 삶이다. 그리고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안에 무엇인가 날로 새로워지는 그 어떤 것이 창조되었다. ‘해 위’의 삶이 ‘해 아래’의 우리의 삶에 뚫고 들어와서 임함으로 새로운 피조물, 즉 새 사람이 되었다. 그 현실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므로 ‘under the Sun’이 아니라, ‘under the Son’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보혜사: 위로의 성령
코헬렛은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고난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자가 없다고 한탄한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 4:1).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3~6) 말함으로, 코헬렛은 위로자가 없다는 탄식을 반복해서 말하는데, 우리에게는 위로자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반복해서 말하면서 우리에게는 참된 위로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전도서를 묵상하면서 이런 현실을 깨달아 내면서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떻게 위로자가 생겼을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위로부터 보혜사가 임함으로 가능하다. 보혜사는 헬라어 ‘파라클레-세스’의 역어로서, 위로하다, 격려하다, 부르다, 초청하다 등의 동사에서 온 형용사이다.

사망에서 영생의 삶
끝으로 모든 ‘헛되다’의 결과는 사망이다. 모든 사람이 허무한 것에 굴복하다 결국은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타락한 피조물(죄인)들의 인생이다. 코헬렛은 이를 좀 더 극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코헬렛은 타락한 모든 인간은 평생 미친 마음을 품다가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은 자들이 더 복되다고 하거나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한 부끄러움이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는 소망 때문이다. 죽음은 죄인에게는 영원한 형벌의 시작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그 새 생명을 요한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새 생명이 있다. 심지어 그들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복이 되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모두 다 미친 짓을 하다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새 생명을 소유하고 헛된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어 복된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코헬렛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이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모든 일은 의미가 있는 것이고, ‘해 아래’ 헛된 것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해 아래 헛된 것에 굴복하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해 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코헬렛의 통찰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자들은 삶의 기쁨과 만족과 목표와 의미도 새롭게 세워진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헛된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그렇게 살기로 힘쓰며, 우리가 궁극에 가게 될 하늘나라만을 소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코헬렛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올해 마무리 인사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님의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쓴 마지막 편지에 실린 시를 노래한 ‘선한 능력으로’의 일부를 소개한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