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김군! 오늘은 성경 하브루타에 대해 자네와 나누는 마지막 시간이라 아쉽구먼. 오늘은 하브루타 전문가가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나누고 싶네.
I: 벌써요? 너무 아쉬워요. 전 아직도 목마릅니다.
P: 나도 아쉽네. 목마름은 자네를 더 멋진 하브루타의 세계로 인도할 걸세. 오늘 내가 해주고 싶은 얘기는 하브루타 전문가가 되기 위한 조언인데 하나는 가르치는 사람에게 또 하나는 부모에게야. 유대인들의 경우 자녀를 제자 삼아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해.
I: 그래서 유대인 부모들이 자녀교육에 열심을 내는 거군요.
P: 그렇지. 기독교인 가정의 부모들이 자녀를 제자 삼아 하나님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나? 특별히 위탁이 필요한 교육도 있지만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위탁교육에 의존한다는 점이 많이 아쉬워.
I: 오늘 하브루타 전문가가 되기 위한 조언을 들려주신다고 했는데, 목사님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P: 가르치는 사람은 세 가지 측면에서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해. 자신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야. 그건 부모와 교사 다 마찬가지이고, 아이들에게도 심어주어야 할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고.
I: 잘 가르치는 것과 관계 설정이 어떤 연관이 있나요?
P: 본래 아이들은 가르치는 사람을 닮는다고 해. 그래서 ‘누구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는가’는 아이들의 일생을 좌우할 만큼 너무 중요한 일이야.
I: 아! 그런 의미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가르치는 사람의 관계 설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P: 먼저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해. 그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고 세상을 향한 목적의식과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고, 또 나를 통해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를 찾는 거야. 그래야 가르치는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르침을 행할 수 있다네.
I: 신앙적인 정체성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나요?
P: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 확신 위에 날마다 주님과 연합하는 삶을 살아야 해. 그럴 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 수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주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많은 열매들을 맺게 되는 것이 성경의 원리잖나. 특히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언제나 묻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네. 하나님은 우리가 늘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라시지.
I: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이 가르침을 받는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말이죠?
P: 맞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얼굴 앞에 서 있어야 하는 이유일세.
I: 그럼 이웃과는 어떤 관계 설정을 해야 하나요?
P: 나 외의 모든 사람이 이웃이야. 가깝게는 가족을 비롯해, 친구, 교회 공동체, 직장, 지역사회, 우리나라, 다른 나라 사람들 모두가 이웃이지. 유대인들이 말하는 ‘티쿤올람’을 이웃과 더불어 하는 거야. 가정을, 친구 관계를, 교회 공동체를, 직장을, 지역사회를, 우리나라를 믿음 안에서 더 좋게 만드는 거야.
I: 어떻게‘티쿤올람’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P: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거야.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가르침으로, 물질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물질로, 섬김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섬김으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고,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는 거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네.
I: 이웃과의 관계가 쉽지 않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P: 오늘날 한국 사회는 지나친 대립과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 이념, 물질, 세대, 젠더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야. 그런데 옛말에 ‘마귀와 싸우다 마귀가 된다’는 말이 있어. 우리가 대립과 갈등으로 싸움을 하다 보면 본질은 사라지고 감정 쓰레기만 남아. 결국 그런 것들이 자신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게 돼. 그래서 싸우려고 하지 말고 먼저 들어주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거야. 물론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지만 세 가지를 생각하면 위로가 돼.
하나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던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 주셔서 천국 소망을 가진 자로 살아가게 해 주셨다는 거야. 또 하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셔서 나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다 보신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것도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말씀을 믿는 것일세. 어떤 때는 도저히 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어.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손해도 보고, 양보도 하고 배려도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진짜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말하지.
I: 목사님! 지금까지 가르치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이제 교육 현장에서 사역하는 교사들이 하브루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P: 지금까지 성경 하브루타 사역을 하면서 깨달은 몇 가지를 나누고 싶네. 첫째는 아이들을 볼 때 가르침의 대상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생각해야 해.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하나님의 기업이 될지 몰라. 그러니 하나님의 기업으로 사랑하고 차별하지 말아야겠지.
둘째로는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주님이 성육신하신 것처럼 아이들 눈높이로 내려가야 해. 아이들의 시선으로 말일세.
셋째는 하브루타에서 가장 중요한 거지. 가르치지 말고 질문하는 거야. 그리고 질문을 했으면 기다리면서 아이가 말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어야 해. 마지막으로 성경 하브루타의 독특성이기도 한데,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과 뜻으로 돌아가는 거야. 하나님이 무엇을 알려 주시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고, 우리가 무엇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찾는 거야.
I: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자세와 기술까지 말씀해 주셨네요. 그런데 목사님 우리나라 기독교 가정의 부모들이 호레이스 부쉬넬이 지적한 것처럼‘타조의 양육’이 아니라 유대인들처럼 철저한‘신앙적 양육’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P: 아이들은 부모의 앞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은 부모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며 자란다는 말이야. 그런데 한국인들은 신앙 여부를 떠나서 자녀들과 소통을 어려워해. 그 이유는 감정적이기도 하지만, 성격이 너무 급해. 잠언에서도 말씀하셨듯 조급함은 교육에서 최대 적이야. 그래서 가정에서 자녀들을 제자 삼아 신앙교육을 잘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서 해왔던 방법들을 소개하고 싶어.
첫째는 훈계 이전에 공감을 먼저 하는 거야. 아이의 잘못을 무조건 수용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알아주라는 말 일세. 아이들은 자기 잘못을 알아.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누군가 그것을 공격할 땐, 자연스럽게 방어심리가 발동을 해. 그럼 잘못한 일 자체보다 결국 감정적으로 변하게 되고 마음의 상처만 남게 되지. 아이들은 어렸을 때 충분히 실수할 수도 있고 시행착오를 거칠 수도 있는 권리가 있어. 부모가 넓은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아이 마음을 읽어주면, 아이는 정서적 안정감을 갖게 되지.
둘째로는 부모의 정직이 아이의 정직으로 이어지는 법이지. 부모도 실수할 수 있고, 약속을 못 지킬 때도 있어. 그럼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해야 해. 셋째는 아이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인격체로 보아야 해. 그래서 함부로 말하기보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람에게 하듯 살리는 말, 긍정적인 말, 용기를 주는 말 들을 해주면 더 좋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시하지 말고 질문하는 거야.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충분히 그리고 마음껏 말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가능하면 아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도 좋아. 그러려면 부모들은 기다려주고 인내하는 훈련을 해야 해.
오늘 목사님과의 대화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웠다. 몇 개월간 매주 화요일 저녁은 단순히 지식이 아닌 지혜의 깊은 샘에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시간이었다. 몇 개월 동안 내겐 큰 변화가 있었다. 가르치는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성령님을 의지한 가르침을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먼저가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대할 때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마구 솟는다. 그건 언제나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였다. 매주 파김치였던 마음이 이제는 아이들의 마음 뚜껑을 빨리 열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