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수도원 사건
덕원수도원은 독일계 베네딕트 수도원이 1909년에 한국에 들어와 덕원에 설립한 것으로 원산의 여자 수도원과 함께 북한 가톨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당시 독일인 신부 13명, 수도사 24명, 한국인 신부 4명, 한국인 신학생 수도사 100명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일성 정권은 이들을 전혀 근거 없는 정치적 범죄 음모 혐의를 뒤집어씌워 말살한 것이다.
그들은 수도원 및 신학교의 성물을 남김없이 부수고 태워 버렸다. 이에 항의문을 제출한 평양교구 주교 홍용호는 얼마 후 행방불명이 되었고, 평양에 있는 모든 신부들도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6.25동란 직후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행방불명된 목회자 수
장로교 | 감리교 | 성결교,기타 | ( 계 ) | 여자 전도사 수 합하면 그 수는 훨씬 상회 |
260명 | 50명 | 40명 | 350명 |
공산주의와 종교는 처음부터 공존할 수 없는 것
공산주의와 종교는 처음부터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 유화정책을 썼던 것도 종교계를 회유하려는 일환이었을 뿐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종교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붕괴시키려는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이다. 공사립학교를 모두 통폐합시켜 인민학교를 만들어 유물사관의 이념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1948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부터는 양성적으로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1949년 초부터는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말살하기 시작했다.
6.25 전쟁과 한국 교회의 수난
남한의 교회들은 북한에서 형제 교회들만큼 그렇게 심각한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공산주의와의 대립과 갈등이 적지 않게 만연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남한 교회는 재건 과정에서의 교회 내적 혼란을 감출 수 없었고 더불어 사회 혼란에 편승한 공산주의들의 만행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한경직 목사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1949년에 출간한 <건국과 기독교>에 실린 “기독교와 공산주의”에서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종교는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현실을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아편이 아니며, 또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는 것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역사관과 맥을 같이하는 공산주의 유물사관에 근거하고 있다.
그가 볼 때 공산주의자들에게는 계급의식만 있을 뿐이요 민족이란 관념은 없으며, 동일한 민족일지라도 다른 계급이면 적이요, 다른 민족이라도 동일한 계급이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동지들이다.
유물사관을 사회 철학으로 하고 계급투쟁을 주창하는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계급투쟁과 혁명을 통해서 정권을 얻은 후에는 프로가 독재하고 계급 없는 사회에 이를 때까지 무자비한 투쟁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계급과 지식계급과 그 외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모든 인물은 다 숙청하고 봉건제의 잔재인 종교와 도덕도 다 전멸시키고 생산 기관이나 소비 기관은 다 국유로 한다는 것이다.
남한에서만 교계 지도자들이 희생당한 것은 아니었다. UN군이 북진하자 북한군은 북한에 남아있는 교회 지도자들을 살해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교계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순교 당했다.
전쟁의 피해와 복구
6.25전쟁으로 인해 장로교 152교회, 감리교 84교회, 성결교 27교회 그리고 구세군교회 4교회를 비롯 수많은 교회들이 파손되거나 손실되었다.
장로교 지도자 177명, 감리교 지도자 44명, 성결교 지도자 11명 등 수백 명의 교계 지도자들이 순교 당하거나 납북되었으며 그리고 전쟁의 피해, 공산군의 학살, 교회의 파손과 지도자 상실로 인한 한국 교회의 신앙적 정신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남북한은 이 전쟁으로 군인 민간인 모두 합쳐 3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와 같은 전쟁의 피해 속에서도 한국 교회가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미국에서는 한국 피난민에 대한 호소가 교계는 물론 비종교 단체들에까지 활발하게 일어났다.
여자 클럽 총연맹(The General Federation of Women’s Club)은 한국에 150만 불을 지원할 목표로 “Care for Korea Drive”을 전개했고, The American Relief for Korea 회장 Douglas Fairbanks Jr는 “한국의 1000만 난민에게 옷을 보내자”는 운동을 전개해 천만 달러어치의 구호물자를 한국에 제공했다.
그 외에 수많은 단체들이 한국에 구호물자를 지원했으며, 전쟁 기간 중 전쟁 포로들에 대한 선교활동도 계속되었다.
6.25전쟁 기간 중 전쟁 포로들에 대한 선교활동
Harry J.Hill 목사 | 대구 부산에 수용된 전쟁포로들에게 복음전도 |
Earle J.Woodberry 목사 | 중국인 포로에게 복음전도 |
Harold Voelked 목사 | 전쟁 포로에게 복음전도 |
Arch Campbell 목사 | 전쟁 포로에게 복음전도 |
Voelkel 목사 | 미군들과 함께 평양에 입성해 10만명 포로에게 전도 |
John E. Talmage 목사 | 전쟁 포로에게 복음전도 |
미국 성서공회 | 15만권 성경을 포로들에게 제공 |
미국 무디성경학교 | 50만부 복음전단지 제공 |
Bob Pierce’s World Vision 회사 | 예배에 사용할 휴대용 오르간, 트럼펫, 트럼본, 아코디온, 플릇, 하모니카 등 악기 제공 |
<도표설명>
*15개 성경학교에서 3,800명의 학생들이 수강했고, 3,000명의 사람이 성경 각 권을 다룬 소안론 성경통신 과정을 마쳤다.
*1951년 거제도에 한국인 14만 명과 중국인 1만 4천 명의 포로들을 수용한 대규모의 포로수용소가 건립되면서 더욱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1950년-1953년 한국전쟁과 기독교인들의 순교의 시기
1949년 말 북한은 한국전쟁을 준비하면서 김일성 집단은 종교의식이 발각되면 체포하였고 수시로 종교인들의 가택을 수색하면서 종교관계 서적만 발견하여도 이를 불온문서로 취급하여 체포 구금 등 탄압을 시작하였고 이 시기부터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고난을 함께 하여야 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6.25는 종교단체와 종교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의 순교 시대로 다가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민족주의 기독교인 조만식 장로를 살해하면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 살해를 했다. 이 시기에 살해를 당한 기독교인 통계는 없으나 수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 집단은 그들이 후퇴하면서 기독교 종교인들을 무차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려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였고 죽였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 양심에 따라 신앙을 지키면서 끝까지 저항을 하였으며 이 시기에 북한에 있던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남한으로 월남을 했다.
북한은 북한지역에 있던 종교관련 건물 시설들을 파괴해 버리거나 구조를 변경하여 다른 목적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한으로 월남을 하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시기에 숙청됨에 따라 북한 기독교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고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을 반혁명 세력으로 몰아 탄압을 본격적으로 하였고 그 후 기독교는 지하교회와 지하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