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고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질문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한 살배기 아기도 질문이 있습니다. 왜 엄마는 밥 때가 지났는데 우유를 안 줄까? 기저귀에 오줌을 쌌는데 왜 눈치를 채지 못할까? 찝찝해 죽겠는데 왜 기저귀를 안 갈아줄까? 왜 엄마는 내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 바로 알아채지 못할까?
가벼운 질문이 있는가 하면 깊은 질문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의 질문이 그것입니다(막 10:17). 모든 것을 가졌지만 영생이 없지 못하면 구멍 난 인생과 같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제자들이 서로 던진 질문입니다(막10:26). “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진지한 질문입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28)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과는 별개로 613개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사람 몸의 지체 수로 여겨지던 248개는 ‘~ 해라!’는 적극적 행위를 촉구하는 규정이고, 1년의 전체 날 수에 해당하는 365개는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규정이었습니다.
유대교 선생인 랍비들은 이 613개 규정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계명이고 가벼운 계명인지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 계명이고 부수적인 계명인지 끝없는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궁금해하고 질문하는 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질문하고 있는가? 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입니다. 부자 청년은 진지하게 예수님께 영생에 대해 묻고 예수님께 대답을 들었으나 올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갔습니다. 질문보다 중요한 것이 올바른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말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무엇일까요?
첫째, 변론보다 변화입니다(28절)
28절을 보시면,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앞에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변론을 했습니다.
변론이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질문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변론으로 흐르면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변화’라는 올바른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전날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다 내쫓은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예수님께 와서 질문하며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고 변론해온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막 11장 27-28절). 종교 지도자들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사 56:7)고 하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깨끗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뒤로는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뒷돈을 받아 챙기고 있었습니다. 성전에 이방인들이 올 수 있는 이방인의 뜰을 시장통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장사하는 사람을 다 내쫓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로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로 변론을 걸어온 것입니다. 성전은 자신들의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권위를 더 내세우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고 내쫓으신 이유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은 껍데기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것처럼 심판을 면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껍데기 신앙이 아닌 열매 있는 신앙으로의 변화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전 청결 사건 앞뒤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예수님이 저주하신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변화는 없고 질문만 있으면 안 됩니다. 주님은 질문을 그치고 이제는 변화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변화는 하지 않고 계속 질문만 합니다. 변론만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같은 내용을 다루는 마태복음 22:35절을 보시면,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도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입니다. 삶의 변화를 위한 질문이 아니라면, 그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주님은 변론보다 변화를 원하십니다. 내 삶에 변화를 위한 질문을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대답보다 회개입니다(32-34)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라는 한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님이 정확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반응합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32).
예수님의 말씀에 응용해서 대답합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33).
무슨 이야기인가요? 예배의 형식보다 예배자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빠진 예배는 외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 하나님을 온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고 살아갈 때,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의 질문자들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 답변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3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 탐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지혜로운 대답에 머물지 말고 진정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서기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진실한 예배자가 먼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서기관은 아직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예수를 그리스도와 구원자로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답변보다 중요한 것이 진실한 회개입니다. 지혜로운 답변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질문보다 결단입니다(34)
오늘 본문 마지막이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34) 이제는 질문할 때가 아니고 결단할 때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러 사람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주의자 민족주의자입니다. 헤롯당은 친 로마 성향의 사람들입니다. 두 그룹이 손잡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손잡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넘어뜨리기 위한 공동의 목적이 있자 잠시 손을 잡은 것입니다.
로마 가이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금을 바치리이까? 바치지 말리이까?’ 질문합니다.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라 헤롯당원들이 잡아갈 것이고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이 선동하여 반민족주의자라고 예수님을 공격할 태세였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예수님을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은화 동전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시고는 동전에 누구의 형상이 있고 어떤 글이 있느냐? 물으시고 로마 황제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 있음을 깨우쳐 주시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언을 하십니다. 그 은화를 사용하고 있으니 세금 잘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황제 숭배는 하지 말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온전히 돌리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헤롯당 양쪽이 파 놓은 함정을 유유히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들이 보인 반응이 17절에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그랬습니다. 놀랍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한 것을 회개하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예수에 대해 놀라기만 하지 말고 구원의 결단, 믿음의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문보다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남은 것은 결단입니다. 신앙의 결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질문보다 중요한 것이 올바른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변론보다 변화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지혜로운 대답보다 진실한 회개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질문보다 결단을 원하십니다. 우리 삶에 변화와 회개와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