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사진>시벨리우스 교향시

봄이 왔습니다. 남국의 작은 나라 뉴질랜드에도 우리가 사는 오클랜드에도 봄이 왔습니다. 지난 겨울 무척이나 많은 비가 내리고 때로는 폭우가 쏟아져 곳곳에서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그 틈바귀를 뚫고 봄이 왔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바람은 싱그럽고 내리쬐이는 햇살은 부드럽고 투명합니다.

그런데 이 봄에 웬일인지 어딘가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고 이유 없는 슬픔이 마음을 적십니다. 아마도 끈질기게 오래 계속되는 코로나로 인해 지쳐서 봄이 와도 무언가를 상실한 느낌이 들어서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봅니다.

이럴 때 문득 생각나는 시(詩) 한 편이 있습니다. 이상화(李相和)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입니다. 지금 우리는 시인이 겪었던 시대처럼 빼앗긴 들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전 세계를 휩쓰는 못된 전염병으로 인해 3년이나 되는 세월을 많은 것을 빼앗긴 채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일그러진 삶을 헤치고 우리를 찾아준 봄은 반갑지만 그렇게 찾아온 봄을 가슴을 활짝 열고 맞을 수 없기에 마음 밑바탕에서 한줄기 슬픔이 솟아나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음악을 듣기 전에 먼저 이 시(詩)를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함께 소리 내어 읽었지만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여기에는 첫 연과 마지막 연만 적어봅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중략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라도 찾아온 봄이 반가워 시인은 다리까지 절며 하루를 걸었지만 문득 주위를 둘러보다 혹시 봄조차 빼앗길까 걱정합니다. 빼앗긴 들(나라)이 안타까워 시를 통해 절규한 시인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음악을 통해 빼앗긴 나라를 절규한 음악가가 있습니다.

바로 지난 두 주 동안 우리가 들었던 핀란드의 작곡가 시벨리우스입니다. 그가 작곡한 교향시 핀란디아(Finlandia)와 타피올라(Tapiola)가 바로 음악을 통해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식을 부르짖은 작품입니다.

애국심에서 태어난 명곡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Symphonic Poem op. 26)
핀란드의 역사와 지리적 환경은 어쩌면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많이 닮았습니다. 이웃 나라인 강국 스웨덴과 러시아의 틈바귀에서 오랜 기간 수난을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12세기부터 거의 6세기 동안 스웨덴의 지배 밑에서 살아야 했고 19세기 초부터는 러시아의 지배 밑에서 신음하였습니다.

특히 시벨리우스(1865~1957)가 살던 시대는 러시아의 압제가 더욱 심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더구나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탄압을 강화하기 위해 1899년 2월에 핀란드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선언을 발표하자 이에 대항하여 예술가와 언론인들이 다방면으로 대항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시벨리우스도 그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같은 해 11월에 언론 연금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사가 열렸고 이 행사에는 핀란드의 역사를 다룬 역사극의 공연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행사의 마지막 연극인 ‘역사적 정경’에서 사용된 음악이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곡으로 그때 이름은 ‘핀란드여 일어나라(Suomi herää)’였습니다. ‘수오미(Suomi)’는 핀란드의 별칭으로 호수와 늪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곡이 오늘날 우리가 듣는 ‘핀란디아’의 초기 버전입니다.

이 곡에 쏟아진 핀란드 민중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시벨리우스는 이를 개작하여 교향시로 만듭니다. 이듬해 1900년 7월에 열린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핀란드의 거장 카야누스(Robert kajannus)는 헬싱키 필하모니를 지휘하여 이 곡을 초연하여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수오미(Suomi)’라는 이름으로 연주된 이 곡은 핀란드의 정경을 묘사하며 민중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는 음악입니다. 핀란드 국민의 분노와 저항심을 표출하듯 불안정하고 음울한 서주로 시작하지만 곧이어 목관과 현악기들이 슬프면서도 서정적인 선율을 노래합니다.

그러다가 금관악기가 격렬히 울부짖으며 선동적인 음률을 토해냅니다. 잠시 뒤 소박하고 평화로운 선율이 나오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강렬하게 그리고 웅장하게 음악이 바뀌며 끝이 납니다.

길이가 10분도 채 못 되는 짧은 곡이지만 너무나 민족 색채가 짙고 선동적이라고 러시아 당국은일시적으로 연주를 금지했지만 1904년에 핀란드 국민의 대대적인 스트라이크에 힘입어 해금이 된 뒤 이름도 당당하게 ‘핀란디아’로 고쳐져 핀란드의 국민 음악으로 자리잡았고 전 세계에 핀란드의 독립 의지를 알린 곡이 되었습니다.

교향시 타피올라(Symphonic Poem Tapiola, op 112)
핀란디아를 작곡하며 국민 작곡가의 자리에 오른 시벨리우스는 계속해서 조국 핀란드의 역사와 전설 그리고 민족적 전통문화에 관한 훌륭한 작품들을 써서 성공하므로 국제적 명성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북구의 작은 나라 핀란드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1925년 시베리우스가 60세 되던 해에 나라에서는 그에게 백장미 십자 훈장을 수여했고 멀리 바다 건너 뉴욕 교향악 협회는 그의 60세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품을 의뢰했습니다.

곡의 주제는 시벨리우스가 임의로 정하는 조건이었기에 그는 이 의뢰를 기꺼이 수락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핀란드를 주제로 하는 교향시를 작곡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곡이 ‘타피올라’이며 이는 그의 마지막 교향시이며 뛰어난 작품입니다.

핀란드의 국토는 대부분이 길게 이어진 숲으로 되어 있습니다. ‘타피올라’는 이 숲에 관한 음악입니다. ‘타피올라’는 ‘타피오(Tapio)’의 땅이라는 뜻이고 ‘타피오’는 숲의 신(神)이자 통치자입니다. 결국 ‘타피올라’는 숲의 나라라는 뜻이고 바로 핀란드를 말합니다. 핀란드의 고대 종교에 등장하는 전설을 주제로 시벨리우스는 이 곡을 작곡했습니다.

작곡을 마친 시벨리우스는 출판업자에게 부탁해서 악보 표지에 주제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4행의 시(詩)를 적도록 하였습니다.

거기에 북쪽 나라의 넓고 검은 숲이 있네
원시적인 아름다움 속에 태고의 신비가 있고
그 속에 위대한 숲의 신이 살고 있고
숲의 정령(精靈)들은 어둠 속에 노닐고 있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숲과 호수에 쌓인 핀란드의 정경이 눈앞에 떠오르며 시벨리우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가슴으로 들어옵니다. 한마디로 이 곡은 ‘핀란드 숲의 찬가’입니다.

두 곡 다 명곡이라 좋은 연주가 많지만 Karajan이 지휘한 Berliner Philharmoniker의 연주가 시벨리우스의 서정을 잘 표현했습니다. 화요음악회에서는 이 연주로 들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詩)로 조국의 독립을 고취한 이상화나 ‘핀란디아와 ‘타피올라’’같은 교향시(交響詩)로 민족의식을 고취한 시벨리우스가 있었기에 오늘 대한민국과 핀란드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날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시편 137편 1~3절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시편 기자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다가 나라를 잃고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겪는 고통과 슬픔을 위와 같이 노래했습니다.

오늘날 풍요와 안락 속에 살며 불과 1세기도 안 되는 시절에 우리가 겪었던 고난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언제 또 어려움이 닥칠지도 모릅니다. 항시 깨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