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태복음 5장3절37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스위스 신학자인 에밀 부르너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다는 것은 언어적 존재로, 대화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말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또한 그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할 때, 격려하고 축복하고 위로하는 말, 긍정의 말,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감정이 상했다고 해서,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말을 아무렇게나 하면 그 말에 다른 누군가는 다치고 아파하고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말이 참 많습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사에 따르면, 보통 사람이 죽을 때까지 13년 정도를 말하며 보낸다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하는 날의 경우, 한 사람이 하루에 약 2만 5,000개에서 3만 단어를 말하는데 이것은 70페이지 책 한 권의 분량입니다. 1년 동안 보통 사람이 한 말을 책으로 만들면 150페이지 약 180권을 채울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 사는데,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하느냐입니다. 잠언 12장 18절에 보면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언어생활은 어떠합니까? 어떤 말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말이 사람을 살립니까? 아니면 사람을 죽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말의 진실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말’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맹세’에 관하여 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네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하늘, 땅,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사용했던 맹세의 수단이었고, 그 모두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는 단어들입니다. 왜 그렇게 맹세합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거짓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교묘히 거짓을 진실로 포장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막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십계명의 3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출애굽기 20:7)’이 되고, 9계명인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애굽기 20:15)’를 위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재판에는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없었기 때문에 목격자나 본인의 증언에 의해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말 한마디에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때 맹세를 시켰던 것입니다. 그 맹세한 것이 진실하다는 것과 만약에 거짓이 있다면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서약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통제하기 위해서 또한 자신이 지켜야 할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각성시키기 위해서 맹세시켰는데,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용이 되었습니다. 거짓으로 맹세하거나 함부로 맹세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부작용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왜 이런 무책임한 일을 행하는 것일까요? 당장의 눈앞의 이익 때문에, 혹은 현실의 문제를 당장에 모면하기 위한 죄 된 마음에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아주 교활한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거짓말을 해도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벌하심이 없기에 처음에는 두려움 마음으로 했는데, 이제는 자동으로 거짓말이 스스럼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직분을 받고, 교회에서 일을 한다 해도 이러한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없고 또 오늘을 하나님의 나라로 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거짓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차라리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37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 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듯 말은 진실해야 합니다.
오늘 산상수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요지는 3가지입니다.
첫째, 우리의 말은 하나님께 맹세한 말과 같다
평상시 우리가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서, 즉 ‘코람데오’ 정신을 가지고 대화한다면 그 말에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뭐 굳이 그 말에 진실성을 입증하려고 맹세까지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서슴없이 하겠습니까? 있을 수도, 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분께 맹세한 것과 같이 말을 하고 산다면, 우리는 분명 오늘을 하나님의 나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
사람이 왜 거짓말을 할까요? 때로 금전적인 손해가 있을까 하여, 아니면 신뢰 관계가 깨어짐에 대한 두려움, 혹은 지금까지 쌓아놓았던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질까 염려하여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절대로 우리가 속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말은 확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예’할 때, ‘예’하고, ‘아니오’ 할 때, 반드시 ‘아니오’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한 말입니다. 절대로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아니오’ 해야 하는 데 자신의 유익 때문에 우야무야 넘어가면 안 됩니다.
청교도들은 말에 있어서 항상 3가지를 점검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어떤 사람이 말을 전달할 때, 그들은 반드시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청교도들은 들었던 말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 전에 그 말이 사실인가를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부만 확인해도 부정적인 영향은 확산되지 않습니다.
그 말이 덕이 되는가? 이 말이 ‘사실’일지라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덕이 되는가를 물었답니다. 들려오는 말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그 말이 교회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으면 청교도들은 침묵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청교도들은 들려오는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따져 보았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고, 교회에 덕이 되어도, 그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말이라면 그들은 침묵했다고 말합니다.
셋째,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신실하다는 뜻은 ‘믿음직하고 착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다 지키십니다. 우리도 그분을 믿는 사람들로 내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정 안에서 부부와의 약속, 자녀와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오늘을 하나님의 나라로 사는 삶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을 하나님의 나라로 산다는 것이 뭐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닌 것을 또 봅니다. 말 한마디를 정직하게, 진심을 다해서, 진실하게, 또한 누구를 만나든, 어디에서든 그렇게 말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하나님의 나라로 살아가는 삶인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