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저녁에 생각나는 음악가 슈베르트

뉴질랜드의 7월은 한겨울입니다. 어둠이 일찍 내리고 습하고 차가운 날씨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계절입니다. 을씨년스럽고 음산하기만 한 이런 겨울 저녁에 떠오르는 음악가가 한 사람 있습니다.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입니다.

살아생전 인정도 못 받고 줄곧 가난 속에 살다가 31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가련하고 애절한 음악가가 슈베르트입니다.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일기에다 ‘남의 진짜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의 고통에서 우러나온 작품은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만 같다.’라고 썼을까요?

하지만 그 짧고 힘든 삶 속에서도 그는 1,000곡이 넘는 아름다운 음악을 남겼습니다. 그중 대부분인 600여 곡은 가곡입니다. 죽기 불과 몇 달 전까지 자기 소유의 피아노가 없었던 그는 기타에 의지하여 작곡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남긴 가곡은 모두 주옥같이 아름답기에 우리는 그를 가곡왕(歌曲王)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남긴 세 개의 연가곡(連歌曲, song-cycles)
연가곡이라 하면 여러 곡의 가곡이 같은 내용으로 연결되는 곡을 말합니다. 베토벤이 맨 처음 시도했고 그 뒤 몇몇 작곡가들이 곡을 남겼지만 가장 유명한 연가곡은 슈베르트가 남긴 3대 연가곡으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겨울 나그네, 그리고 백조의 노래입니다.

슈베르트는 이십 대 후반에 친구 집에 갔다가 빌헬름 뮬러(Wilhelm Müller)의 시집을 만났습니다. 뮬러 역시 불과 34세에 요절한 시인이서 그랬는지 슈베르트는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그중 20편의 시를 선택해서 처음으로 작곡한 연가곡이 그 유명한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입니다.

이 곡을 작곡한 뒤 4년 뒤에 역시 뮬러가 지은 같은 이름의 시 ‘겨울 나그네’를 바탕으로 24곡을 작곡한 연가곡이 ‘겨울 나그네’입니다. ‘백조의 노래’는 1828년에 슈베르트가 죽은 뒤 빈의 출판가 하즈링거가 마지막 해에 작곡된 14곡을 하나로 모아 출판한 연가곡입니다.

그가 남긴 최후의 작품이라는 의미로 ‘백조의 노래’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이 중에 오늘 우리가 들을 곡은 ‘겨울 나그네(Winterreise)’입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Winterreise)’
우리가 흔히 ‘겨울 나그네(Winterreise)’라고 부르는 이 연가곡의 이름은 제대로 번역하면 ‘겨울 여행’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모두에게 ‘겨울 나그네’라고 알려졌고 전곡의 흐름 속에 크게 거슬리지 않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이 이름으로 계속 통용됩니다.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가 죽기 1년 전인 1827년에 뮬러의 시 ‘겨울 나그네’를 바탕으로 작곡되었습니다. 이 해는 시인 뮬러도 34살로 죽은 해입니다. 무언가 비극적인 분위기가 이 곡의 탄생 전후에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두 24곡으로 구성된 이 곡에서 실연당하여 삶의 희망이 없어진 주인공은 눈이 흩날리는 추운 겨울에 정처 없이 방황하며 자신의 감정을 탄식하듯 노래로 펼쳐 놓습니다. 전편에 흐르는 노래의 대부분은 어둡고 우울합니다. 오죽하면 이 곡이 반쯤 완성되었을 때 이 곡을 들었던 슈베르트의 친구들이 너무 무겁다고 탐탁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친구들에게 머지않아 그들도 이 곡이 좋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슈베르트는 생전에 이 작품이 연주되는 것을 듣지 못했고 작품의 초연은 슈베르트가 죽은 뒤 그의 친구 바리톤 요한 포글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곡은 그가 친구들에게 말한 대로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방인(異邦人)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야겠네
이 곡을 듣기 위해 턴테이블에 판을 올리고 바늘을 내린 뒤 자리에 와 앉으면 나지막한 피아노 반주에 뒤이어 바리톤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한숨 쉬듯 탄식하는 제1곡의 첫 구절이 ‘이방인(異邦人)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야겠네’입니다.

주인공 청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마지막 말도 못 붙이고 ‘안녕히(Gute Nacht)’라는 쪽지 하나 문 앞에 놓고 떠나지만 ‘이방인(異邦人)’이라는 구절은 외국에 나와 살고 있는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겨울 나그네’는 아래와 같은 24곡으로 되어있습니다.

1.”Gute Nacht”(안녕히) 2.”Die Wetterfahne”(풍신기) 3.”Gefrorne Tränen”(얼어붙은 눈물) 4.”Erstarrung”(얼어붙음) 5.”Der Lindenbaum”(보리수) 6.”Wasserflut”(홍수) 7.”Auf dem Flusse”(냇물 위에서) 8.”Rückblick”(회고) 9.”Irrlicht”(도깨비불) 10.”Rast”(휴식) 11.”Frühlingstraum”(봄의 꿈) 12.”Einsamkeit”(고독) 13.”Die Post”(우편 마차) 14.”Der greise Kopf”(백발) 15.”Die Krähe”(까마귀) 16.”Letzte Hoffnung”(마지막 희망) 17.”Im Dorfe”(마을에서) 18.”Der stürmische Morgen”(폭풍의 아침) 19.”Täuschung”(환상) 20.”Der Wegweiser”(이정표) 21.”Das Wirtshaus”(숙소) 22.”Mut!”(용기를!) 23.”Die Nebensonnen”(환영의 태양) 24.”Der Leiermann”(거리의 악사)

‘안녕히’란 쪽지를 남기고 떠나는 제1곡부터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는 제4곡까지 음악은 단조로 진행되다 행복했던 때를 돌아보며 그리워하는 제5곡에 이르러 밝은 장조로 바뀝니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우리 모두의 애창곡
성문 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사랑의 말 새기어놓고서 슬프나 즐거울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이 제5곡은 바로 우리가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노래 보리수(Der Lindenbaum) 입니다.

셋 잇단음표의 빠른 진행으로 보리수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을 표현하는 이 곡은 ‘겨울 나그네’뿐이 아니라 슈베르트의 모든 가곡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애창되는 곡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제6곡은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눈물을 노래하고 제13곡에서는 지나가는 우편마차 소리에 ‘혹시라도 편지가 왔을까?’ 하는 기대에 가슴 설레기도 합니다. 하지만 빨리 세월이 지나 평안한 안식 혹은 죽음을 맞기를 기다리는 청년은 제14곡에서는 머리에 서리가 내려 백발이 되었다고 좋아했다가 실망하며 제21곡에서는 “무덤은 내가 쉬어야 할 영원한 숙소”라고도 생각하지만 그곳에도 자리가 없다고 푸념을 합니다.

제23곡에서 청년은 환영 속에서 3개의 태양을 보다가 결국 자기의 태양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마지막 노래인 제24곡에서 청년은 손풍금을 연주하는 늙은 거리의 악사를 만납니다. 아무도 듣지 않고 동전 한 닢 받지 못하는 그에게 자기가 노래할 터이니 반주를 해달라며 ‘겨울 나그네’의 막이 내립니다.

거리의 악사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는 슈베르트의 모습이기도 하고 어쩌면 각박한 세상을 사는 오늘의 모든 청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아름다운 연가곡을 완성한 뒤 불과 1년 뒤 초연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슈베르트의 절망과 외로움이 곡의 곳곳에서 풍겨 나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특히 ‘거리의 악사’는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그 마지막 선율과 가사가 오랫동안 남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클랜드 시내를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길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만납니다.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 피리를 부는 사람, 접시 하나 앞에 놓고 연주하는 이들을 만나면 저는 슈베르트의 ‘거리의 악사’가 생각나서 주머니를 뒤져 작은 동전 한 닢이라도 놓고 떠납니다.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가 부르는 겨울 나그네
좋은 연주가 많지만 누구보다도 피셔 디스카우의 노래를 권해 드립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겨울 나그네’를 그는 40년에 걸쳐 7번이나 녹음하였습니다. 모두 일품이지만 그중에서도 1963년에 제랄드 무어(Gerald Moore)의 피아노 반주로 연주한 녹음이 가장 좋습니다. 화요음악회에서는 이 음반으로 감상하였습니다.

이날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역대상 29장 15절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히브리서 11장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땅에서 우리는 모두 잠깐 동안 나그네의 삶을 사는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으니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그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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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