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얻지 못하여 남산 기슭으로

독일 작곡가 말러(Gustav Mahler)는 그의 교향곡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 끝에서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의 ‘송별(送別)’이라는 시(詩)를 인용했습니다.

下馬飮君酒 말에서 내려 벗에게 술을 권하며
問君何所之 어디로 가시는가 물었더니
君言不得意 벗이 말하기를 뜻을 얻지 못하여
歸臥南山陲 남산 기슭으로 은둔하러 가신다네
但去莫復問 그럼 가시게 다시 묻지 않으리니
白雲無盡時 흰 구름은 다할 때가 없다오

뜻을 얻지 못하여 남산 기슭으로 은둔하러 간다는 벗의 마음이나 그러면 더 이상 묻지 않으려니 잘 가시라는 시인의 마음이나 모두 말러의 마음과 같았기에 이 시로 곡을 마무리했을 것입니다.

말러의 사실상 9번째 교향곡인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
모두 10개의 교향곡(대지의 노래 포함)을 작곡한 말러는 8번 교향곡에 이어 ‘대지의 노래’를 내놓았습니다. 그가 평생 추구해온 관현악과 성악의 만남이 절정에 이른 작품인 이 곡은 사실 그의 9번째 교향곡이었지만 말러는 9번 교향곡이라 하지 않고 ‘대지의 노래’라고 이름했습니다.

그 이유를 말러의 아내인 알마는 남편이 사로잡혀 있던 죽음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고 회고합니다. 베토벤이나 브루크너, 드보르자크 등 말러가 존경했던 선배 작곡가들이 교향곡 9번을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았기에 자기도 그렇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1907년을 흔히 말러의 비극적 전환기라고 합니다. 큰딸 안나가 성홍열로 죽은 지 얼마 안 돼 말러는 심장에 심각한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약해지고 삶의 허무와 무상을 느끼고 있던 그때 그의 눈에 뜨인 책이 한스 베트게(Hans Bethge)가 독일어로 번역 편집한 ‘중국의 피리(Die Chinesische Flote)’라는 시집(詩集)이었습니다.

번역은 정확하지 못했지만 절망에 빠져있던 말러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이국적 아름다움과 신비에 싸인 듯한 동양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사상에 빠져들었습니다. ‘대지의 노래’는 이 시집을 읽고 감명받은 말러가 시집에 나오는 7개의 시(詩)를 바탕으로 작곡한 곡입니다.

‘대지(大地)의 노래’가 아닌‘현세(現世)의 노래’
이 곡의 독일어 원제는 ‘Das Lied von der Erde’입니다. 일본에서 ‘大地の歌’라고 번역한 것을 그대로 가져와 우리도 흔히 ‘대지의 노래’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여기에서 독일어 ‘Erde’는 ‘대지’라는 물질명사로 생각하기보다는 ‘현세(現世)’라는 추상명사로 보아야 맞습니다.

모두 6악장으로 되어있는 이 곡의 첫 악장부터 마지막까지 말러는 이 땅에서의 삶, 즉 ‘현세’의 슬픔과 고통을 옛 시인(詩人)들의 시(詩)를 빌어 노래합니다. 결코 대지의 목가적(牧歌的)인 아름다움이나 고마움을 노래한 음악이 아닙니다. 이제라도 이 곡의 제목을 ‘현세(現世)의 노래’로 바로잡아 ‘대지의 노래’라는 제목이 풍기는 선입견으로 음악을 듣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곱 개의 한시(漢詩)로 구성된 여섯 악장의 교향곡
이 곡은 두 명의 성악 독주(테너 또는 바리톤과 알토)와 관현악단을 위한 대규모의 교향곡으로 여섯 개로 나뉜 악장이 각각 하나의 독립적인 곡으로 전개됩니다. 여섯 개의 악장 모두가 한시(漢詩)를 바탕으로 한 곡이므로 말러의 음악 중 동양의 모티브를 사용한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서양 음악에서 동양의 시(詩)를 인용하여 만든 최초의 교향곡이기도 합니다.

말러가 베트게(Hans Bethge)의 시집(詩集) ‘중국의 피리(Die Chinesische Flote)’에서 선택한 시는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 전기(錢起),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등의 시입니다. 하지만 베트게는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고 프랑스의 번역본을 독일어로 옮겼기에 번역이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말러가 작곡하면서 시(詩)를 조금씩 고쳤기에 어떤 악장에서는 본래의 시와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특히 처음 세 악장의 시가 그렇습니다. 다행히 4악장부터 6악장까지의 세 악장의 시는 원시(原詩)에 비교적 충실하여 그 뜻이 제대로 전해졌습니다.

각 악장의 제목과 바탕이 된 원시(原詩)와 시인
1악장 “현세의 고통에 대한 술 노래(Das Trinklied von Jammer der Erde)”
이백의 시 ‘비가행 悲歌行’에 기초한 악장으로 ‘삶은 어둡고 죽음도 어둡다’라는 주제입니다.

2악장 “가을에 고독한 자(Der Einsame im Herbst)”
불확실하지만 전기(錢起)의 시 ‘효고추야장 效古秋夜長’에 기초한 악장으로 마음 속의 가을이 너무 깊어 고독의 눈물을 마르게 해 줄 희망의 태양을 갈구하는 노래입니다.

3악장 “청춘에 대하여(Von der Jugend)”
이백의 시 ‘도기(陶器)의 정자’에 기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원시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비교적 밝은 악장으로 연못이 있는 정자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며 이야기하는 노래입니다.
4악장 “아름다움에 대하여(Von der Schönheit)”
이백의 ‘채련곡 採蓮曲’에 기초한 악장입니다. 처녀들은 꽃을 따고 청년들은 말을 타고 달리는 광경을 묘사하며 젊은이들이 꿈꾸는 삶의 환희를 그립니다.

5악장 “봄에 술 취한 자(Der Trunkene im Frühling)”
이백의 ‘춘일취기언지 春日醉起言志’를 바탕으로 한 악장입니다. ‘삶이 한갓 꿈에 지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수고하는가? 나는 밤낮 술이나 마실까 보다’라고 무상한 삶을 노래합니다.

6악장 “고별(Der Abschied)”
당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숙업사산방시정대부지 宿業師山房時丁大不至’와 시인 왕유(王維)의 ‘송별 送別’이 함께 바탕이 된 악장입니다. 전곡 중 가장 장대한 악장으로 말러가 현세에 대한 고별 인사를 하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대단원은 말러가 추가한 다음과 같은 가사로 끝이 납니다.

사랑스러운 땅 어디나 봄에는 꽃피고 다시 푸르게 자라네
어디에나 영원히 하늘은 푸르게 빛나리! 영원히……영원히……
영원히(Ewig)! 영원히(Ewig)!

6악장 끝 무렵에 어둡고 쓸쓸한 노래가 이어지다가 청아하고 신비로운 음향이 나온 뒤 알토가 ‘영원히(Ewig)’라는 가사를 끝없이 반복해서 부르며 곡이 끝납니다. 독일어로 Ewig(영원히)—— Ewig(영원히)하고 반복되다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알토의 절망적인 목소리는 곡이 끝난 뒤에도 귓속에 잔향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잔향을 통해 현실에 절망하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썼던 작곡가 말러의 심경이 전해오는 것을 느낍니다.

죽음이 두려워 9번 교향곡이라 하지 못하고 곡 이름을 ‘대지의 노래’라고 하였지만 말러는 이 곡을 1909년경에 완성한 뒤 곡의 초연도 하지 못했고 듣지도 못한 채 191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원히(Ewig), 영원히(Ewig)라고 노래했어도 사람의 삶은 영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꼭 들어야 할 명연주
말러가 죽은 뒤 이 곡을 초연한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는 말러의 제자이며 최고의 말러 해석자입니다. 그가 Vienna Philharmonic을 지휘하고 Kathleen Ferrier(알토), Julius Patzak(테너)가 열창한 연주는 꼭 들어야 할 명연주입니다. 화요음악회에서도 이 명연주로 감상하였습니다.

이날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14절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음 뒤의 삶에 대한 우리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소망(또는 믿음) 없는 사람과 같이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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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