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지역 일대 선교 역사

이승훈(세례명; Peter)이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해인 1784년부터 1884년까지 100년 기간을 조선시대의 ‘천주교 선교세기’ 라고 부른다.

조선 조정에서는 1784년 4월에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여, 1791년(신해박해)와 1801년(신유박해)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에 선교사로 와있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천주교도인 수 천명이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런 박해 가운데서도 천주교 일부 지도자들은 ‘텬쥬공경가’, ‘성교요지’, ‘성교전서’, ‘쥬교요지’ 같은 신앙서적을 저술하여 민간에게 널리 알렸다.

1815년부터 1839년(기해박해)과 1866년(병인박해)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여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1845년에는 중국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 ‘김대건’ 신부가 평안도 의주로 월경하여 활동하던 중 발각되어 그 이듬해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인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올라오다가 순교를 당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주변의 조선인들에게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 성경으로 인하여 조선 평양에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설립되어졌다.

19세기~20세기 초반, 만주와 북한지역의 선교활동
1872년에 만주 지역에서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인 존 로스(1841~1915)와 존 매킨타이어(1837~1905)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위한 체계적인 선교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존 로스 선교사는 압록강 상류 부근까지 가서 한 사람의 한인에게 한문 성경 몇 권을 전하고 돌아왔는데 수년 후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또한 존 로스는 1874년에 한중 국경에 있는 고려문에 가서 노방선교와 설교를 하며 한국어 성경을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의주 출신인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이응찬은 존 로스의 한국어 어학 선생이 되는 한편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세 명의 의주 청년과 함께 존 로스의 한국어 성경 번역 작업에 협력하였다. 1879년 네 사람 모두 메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또한 같은 해에 만주 우정에서 존 로스 선교사에 의해 서상륜이 1883년에는 김청송이 세례를 받았다.

초창기 성경번역 및 전도사역
박용규교수는 한국기독교회사에서 초창기의 성경번역을 기술하고 있다.
“1878년에는 존 로스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공역으로 누가복음 초역이 완료되었고, 1879년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 원고가 작성되어졌다. 1891년에 존 로스는 매킨타이어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완성하고, 1881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지원을 받아 인쇄소를 봉천에 설치하여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을 인쇄했고, 이듬해인 1882년에는 첫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셔’와 ‘예수성교요안니 복음전셔’를 발행했다. 이후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인 ‘예수성교전셔’가 완간되었다”

성경번역에 기여한 의주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복음서를 들고 자기 고향에 잠입하여 성서를 반포하면서 선교하였다.

“김청송은 매서인이 되어 1883년 로스의 지원 하에 누가복음과 요한니복음 수 천권과 전도 문서를 가지고 평안북도 강계에서 압록강 건너에 있는 그의 고향 집안현의 한인촌으로 돌아와 그곳 한인들에게 보급했다. 그에게서 복음서와 전도 문서를 받은 이들이 읽고 또 읽어 그 속의 진리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청송의 방문 요청을 받은 로스와 웹스터(James Webster)는 1884년 11월에 동북 만주 산간지대의 집안현을 찾아가 한국인 농민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었다.

이들 선교사들의 방문을 계기로 4촌락에서 평신도를 통하여 16세부터 72세 사이의 75명의 농사짓는 가장들이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가 집안현 이양자에 설립됨으로써 모국 복음화의 교두보가 확보되었다”.

증가되는 세례자들
로스가 보낸 1884년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 말고 한국인 부락에서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600명이나 되었다’고 기술하였으며, 1886년 로스는 ‘이 복음 전도는 아직도 북한의 압록강 연변에서 계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고 보고하였다.

또한 로스는 “이 교회가 자라서 수년 안에는 모국에 복음을 전파하여 북한 전체가 복음화 될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이로써 저들의 말로 만들어진 복음서와 전도문서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고 말하였다.

1884년 로스의 방문과 세례로 태동된 집안현 이양자교회는 모교회가 되어 그 주변에 수많은 교회들이 태동되는 모체가 되었으며, 남북만주 일대에 천 여개의 한인교회가 설립되었고, 십 여개의 노회와 총회가 조직되었으며, 4,5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당시 진행된 국내 복음화의 방향은, 김청송에 의한 서간도 복음화와 이성하와 백홍준에 의한 의주지역의 복음화가 진행되었다.

백홍준은 우여곡절 끝에 다량의 한글성경을 압록강을 넘어 가지고 들어오는데 성공하여 의주를 중심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강계, 부성, 삭주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의 지경을 넓혀 나갔다. 백홍준의 전도를 받은 의주 사람사람들은 1889년에 압록강에서 세례를 받고 의주교회를 창설하였다. 1892년 백홍준은 봉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세상을 떠나 내국인로서는 최초의 개신교의 순교자가 되었다.

일본에서의 이수정
이와 같이 중국에서 존 로스와 몇 명의 한국인에 의해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일본에서도 이수정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수정이 40세 되던 해 1883년에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illiam Knox) 에게서 세례를 받은 소문이 퍼지자 일본에 와있던 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 선교에 관한 선교의 열을 한층 더해 주었다.

아시아로 가려고 했던 사도 바울이 마게도니아인의 요청을 듣고 유럽선교에 발을 디딘 것처럼 당시 일본에 있던 이수정은 한국인 동포의 영혼구원을 위해 혼신을 다하였다.

한국의 선교는 성서 번역에서부터 출발
한국의 선교는 성서 번역에서부터 출발했으며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며, 또한 교회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해서 자립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이미 개신교 신자들이 국내에 생겨나고 있었고, 회심한 이들이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으며, 성경이 대량으로 반포되고 있었고, 그리고 특별한 것은 기독교가 만주에 흩어진 한인들 사이에 놀랍게 확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