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는 착한 아이일까, 자존감이 낮은 아이일까?

친구의 남편은 바른 생활 사나이다. 선비처럼 생겼고 직장도 탄탄하다. 둘은 한눈에 반해 결혼한 사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후 부딪치는 일이 자주 생긴다고 한다.

상황이 급해 “여보, 기저귀 좀.”, “빨래 좀 세탁기에서 꺼내.” 조금이라도 명령조로 말하면 남편의 표정이 금세 굳어진다는 것이었다. 다툴 일이 없는데 유독 저런 일로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아이 앞에서 싸울 때도 있다며 친구는 속상해 했다.

착한 아이, 언젠간 지랄 총량을 채운다
엘리트로 공부를 잘했던 그 남편의 성장 배경을 조금 더 물어보았다. 친구의 시어머니는 젊었을 때 남편을 아주 엄격하게 교육했다고 한다. 그 남편은 순한 성품 탓에 반항 한번 없이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남편은 솔직한 감정표현에 서툴다고 한다. 그저 아이랑 많이 놀아주는 자상한 아빠이자 책임감 강한 남편으로 살아간다.

이야기를 듣는 즉시 자존감이 낮은 ‘착한 아이’로 자란 전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물도 준수해 따라다니던 여자들도 많았던 남편이 연애도 거의 해보지 않았다며 친구는 늘 신기해했다.

몇몇 에피소드를 들으며 난 그 부부의 갈등이 이해되었다. 착한 남편이 건강하게 화를 내고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라고 조언해주었다.

‘지랄 총량’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언젠가는 어릴 때 해야 했을 반항과 지랄을 나이들어서라도 떨어서 그 양을 채운다는 소리다. 그 남편처럼 결혼해서야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리는 사람이 많다. 남자만이 아니다. 장녀로 착하게 큰 딸, 형에게 눌리고 동생에게 치인 존재감 없던 둘째 등 케이스는 다양할 것이다.

착하고 공부 잘하는 아들, 그 남편은 분명 어머니의 자랑이었을 것이다. 장모님도 사위를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남들 눈에는 좋아 보이지만 정작 남편 자신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친구는 아내로서 안타까워했다.

교회 소그룹을 통해 점차 남편이 본인 이야기도 많이 하고 감정표현도 잘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릴 때 지랄 총량을 채우지 못해 이혼으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

더 이상 착하지 않은 십 대 자녀와 잘 지낼 수 있는 비결은 존중이다
자존감은 성공적인 삶에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자신이 귀하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어떻게 알까? 바로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 비친 자신 모습을 통해서 알게 된다.

특히 8세 이전의 부모와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넘어가는 아이들은 어려서 높은 자존감을 형성한 아이들이다.

한 집사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딸아이 사진이 있었다. 쉰이 다 된 집사님의 늦둥이인가 했는데 주인공은 바로 현재 중 3인 딸이었다. 아빠! 아빠! 하며 따르던 때가 너무 그리워 늘 옛날 사진을 올려 둔다고 했다.

또 다른 여자 지인은, 어릴 때부터 맏딸을 엄격하게 키웠는데 동생이 이듬해 바로 태어나며 어리광을 받아 줄 시기도 없었다고 한다. 자신도 어린아이면서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에게 “안아달라고 하지 마. 선생님 힘드시잖아.”라고 말할 정도로 일찍 철이 들었던 딸이다.

그 이야기를 하며 무척 가슴 아파했다. 그런데 중 2인 지금은 딸이 너무 반항적이라 화가 날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럴 때면 어릴 적 영상을 꺼내 보며 마음을 가라앉힌다고 한다.

존경은커녕 끝없이 반항하는 청소년기 아이들 때문에 마음 고생하는 부모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지금 다섯 살인 딸 은율이가 컸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된다.

정신적 독립을 위한 건강한 반항은 좋다. 하지만 무력한 유아 시절 받았던 억압이나 존중받지 못함으로 인해 튀어나오는 부정적 반항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청소년 NGO 단체에서 인성교육 강사로 일할 때 알게 된 분이 있다. 유머러스하며 긍정적인 분이다. 알고 보니 지방 소도시 개척 교회의 사모님이었다. 강연이 있는 날엔 온종일 붙어 지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개인적인 전화 통화 내용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고등학생 아들과 자주 통화를 했는데 사춘기 남자아이들이 그 시기에 엄마와 대화를 별로 하지 않는 게 통상적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조금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날은 수화기 너머 조금 흥분한 것 같은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담임 선생님이 꿈이 뭐냐고 해서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는데…” 그분은 늘 웃으며 친구처럼 아들과 대화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무슨 일인가 물었다. “음악을 하고 싶은데 선생님이 잘 이해를 못 해 주셨나 봐요.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했어요. 우리 아들은 공부를 못해요. 그런데 괜찮아.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면 돼요.”라고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분이 경상도의 명문 국립대를 졸업한 재원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한 반응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 아들은 NGO 연말 파티에 참석해 엄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십 대 자녀를 둔 부모의 모습 중 찾아보기 쉽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분이 자식을 어떻게 대하고 키우셨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사랑하는 딸이 십 대가 되었다고 해서 나를 등지지 않기를 바란다. “십 대가 되면 다 부모랑 멀어지는 거야.”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은율이에게 미운 세 살과 미운 네 살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기 위해 아이가 가장 연약한 지금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며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이 친구뿐 아니라 부모와도 사이가 좋은 이유는 간단하다.

고귀한 존재임을 인정받아본 경험 그대로 타인도 존중할 줄 아는 것이다. 실패 앞에서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즉, 회복 탄력성이 높다. 행복한 승리자로 살 수밖에 없다.

아직도 착한 아이가 좋다는 생각이 든다면,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해보면 좋겠다. 우리 아이를 쓰기 편하고 값이 싸며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기성품으로 키우고 싶은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명작으로 키우고 싶은가.

기성품으로 키우고 싶은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감동을 주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명작으로 키우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