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2

통일 독일을 위한 동서독 교회의 역할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하나의 파트너 쉽으로 보고, 종교의 자유는 기본법에 의한 기본권으로 인정한 서독과는 달리, 동독은 1945년 이후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 독재체제로 돌입하므로서 이전의 나치 독재체제와 더불어 반세기 이상을 국민을 억압하는 국가로 전락했다.

동독의 사회주의 통일당(SED) 독재정권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부여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하여금 공공생활 형성의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 서독교회 간의 통일을 위한 열띤 논의를 불러 일으켰으며, 많은 동, 서독교회의 지도자들은 빠른 영토적 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비텐베르그의 프리드리히 쇼르레모 목사는 심지어 “1989년의 국민운동은 하나의 참된 혁명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국 매수된 결과가 아닌가” 하고 통일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더욱이 서독 개신교 회장인 마틴 크르제 감독은 통일 논의에 대한 자제를 촉구했고 종교회의 회장인 위르겐 슈므데는 빠른 국가의 통일을 위한 교회의 참여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밖에 많은 종교 지도자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태도였다.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 동 서독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동 서독교회는 지속적인 교통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통일에 있어서의 교회와 일반 평신도의 역할은 괄목할만하다. 서독 교회의 지원으로 동독 교회의 봉사활동은 동독 정부에게도 높은 인정을 받았으며, 특히 동독인들에게는 환영의 대상이 되었다.

분단 속에서도 자매결연, 교회의 날, 종교 회의 등을 통한 동, 서독간의 지속적인 교류와 접촉은 독일인들에게 동일한 민족 의식을 가져다 주었고, 이것은 결국 독일 통일에 기여한 여건이 되었다.

동 서독국가는 분단되었지만 교회는 하나의 교회였다. 동 서독의 교회는 같은 성경을 읽고, 해석을 해왔다. 교인들은 똑 같은 찬송을 불렀다. 복음 선포와 신앙의 실천, 교회 생활이라는 분명한 기독교적인 여러 문화 양식이 분단 동안에도 시종일관 똑 같은 형태를 유지해 왔다.

1969년 동 서독의 개신교 교회를 분리시키려는 동독 정권의 압력에 의해 ‘독일 민주공화국 개신교연맹’이 조직되었지만 이는 행정적인 처리를 통하여 이루어졌을 뿐 그 후에도 개신교 교회는 공개적인 설교와 의회주의적인 총회 회의를 통해서 내적인 민주주의를 실행했다. 뿐만 아니라 동 서독교회는 물질적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서독 교회는 1년 예산의 40%를 동독 교회에 지원했다. 이에 비하여 남 북한의 교회는 국가 단절과 동시에 교회 또한 단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미 두 나라는 언어와 문화, 사회, 교육, 종교 등이 이질화된 타문화를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동 서독 교회의 평화 및 인권보호를 위한 노력
동 서독 교회는 평화를 위한 지대한 노력을 했다. 베를린 장벽 구축 이후에는 통일보다는 평화정착을 주장했다.

1969년 동 서독 교회의 분리 이후 동독 교회는 독자적인 평화노력을 하였고, 이것은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민주주의, 인권, 자연보호를 위한 각종 독립적 반대 세력을 위한 생식세포가 되었던 것이다. 평화, 자연 및 인권의 보호는 개별적이 아닌 상호관계 속에서 실현될 수 있고 특히 인권보호의 중요성은 평화의 기본전제로 보았던 것이다.

동 서독관계에서 서독 개신교의 중재적 역할로 이루어진 활동으로 동독 정치범의 사건이 있다. 서독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동독의 정치범을 서독으로 유입하는 것으로 그 중재적 역할을 개신교에게 일임하였다.

개신교는 그 중재적 활동으로 1964년에서 1989년까지 33,000명의 정치범을 34억 마르크를 지불하여 석방하고 그 가족 250,000명을 서독으로 이주시켰다. 여기에서 개신교의 디아코니아는 오로지 인도적 입장에서 서독정부를 도왔던 것이지 일체의 정치적 행위는 없었다.

셋째, 동독 교회의 통일 운동 주도
동독의 평화 혁명시 동독 교회는 반대 및 저항세력의 중심지 및 결정체의 역할을 하였고 이것은 동독의 사회주의 통일당(SED)의 몰락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1989년 동독의 평화 혁명은 비폭력적이고 평화롭게 흘러갔다. 특히 10월 9일 라이프치히의 월요시위는 니코라이 교회의 평화기도에서 시작됐다.

당시 니코라이 담임목사였던 Christian Fuehrer는 2008년 서술한 그의 회고록(우리는 현장에서, -교회에서 일어난 혁명)에서 어떠한 파괴적인 폭력 없이 예수의 정신으로 사람을 대하면 엄청난 변화가 있는지 시사했다. 그리고 그가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있고 공공연히 말할 수 있는 것, ‘예수의 뜻에 따라 행동하라’고 말하였다.

넷째, 동독 과도기의 동독 교회의 중재 (원탁회의)
독일 통일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을 논함에 이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동독 정권의 몰락 이후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의 자유선거가 실시될 때까지의 과도기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원탁 회의’ 성립과 그곳에서의 교회의 중재, 조정 역할이었다.

동독의 사회주의 통일당(SED) 독재는 ‘사회주의 내에서의 교회’라는 표어 아래 교회를 도구화 하면서 동독사회의 비기독교정책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국 교회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셈이다.

독일의 유명한 주간지 ‘슈피겔’의 발행인 루돌프 아우그스탄이 예수 탄생 2,000년 기념 특집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국가와 교회와의 싸움에서 나폴레옹, 히틀러 그리고 호네커도 이기지 못하였다고 했다. 종교를 탄압하는 국가는 결국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동독에는 ‘지하교회’로 명명되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관할 하에서도 동독 교회는 하나의 교회 공동체를 통해 예배하고 설교하고 총회를 결성하여 동독 정부의 통제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독립적인 것은 물론이고 서독 교회 지도자들과 만나면 함께 협의하고 예배하였으며, 필요를 채워주며 어려움을 견디도록 격려하였다.

이러한 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와 인정을 받았으며 존경 받는 공동체로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북한은 전혀 다른 형태의 교회가 존재한다. 북한에서 공개된 교회는 정부의 꼭두각시로 전시적인 교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성도들이 지하에서 숨죽이며 은밀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지하교회가 있을 뿐이다.

이전 기사attention 본문 속으로 들어가기
다음 기사복음 통일의 그날이 속히 오기를
김영수
파라카이 예수사랑교회 다민족 선교 담임목사. 총신대신대원 졸업. 한의사로서 남태평양과 뉴질랜드 지역에 의료 선교 사역을 하고, 미국 그레이스신대원 문화교류학박사 논문인‘북한선교를 위한 접촉점으로서의 복음에 대한 연구’를 쉽게 풀어 2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