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철학? 삶의 지혜?

죽음의 철학자 장자는 중국철학사에서 죽음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한 최초의 인물로, ‘죽음의 철학자’라고 할 만큼 그에게 죽음은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였다.

코헬렛과 장자는 죽음은 하나님의 때, 혹은 명(命)으로 표현되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사건 중 가장 결정적이며 중대한 문제였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죽음을 통한 삶의 의미를 바라보았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다. 밤낮이 항상 있는 것과 같은 하늘(天)의 이치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모든 사물의 참모습이다.

장자는 죽음과 삶을 명(命)이라 하며, 이를 명의 운행(命之行)으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 보았다. 또한, 죽음과 삶은 밤이 낮으로 변하고 낮이 밤으로 변화하는 것과 같이 각각의 절대적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닌 사물의 자연스러운 변화로 해석한다. 그러나 누구나 죽음을 맞이함에 있어 밤이 새면 낮이 되는 것이 하늘의 이치임을 알지만 인간으로는 거부하거나 바꿀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말한다.

얼마 동안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 자상호(子桑戶)가 죽었다.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에 공자가 듣고 자공(子貢)을 보내 일을 돕도록 했다. 혹자는 노래를 만들고 혹자는 거문고를 타고, 서로 어울려 노래를 불렀다. “아아 상호여, 아아 상호여! 너는 이미 참으로 돌아갔는데 나는 여전히 사람으로 남아 있다.” 에서 자상호(子桑戶)와 맹자반(孟子反), 자금장(子琴張)은 막역지우(莫逆之友)로 모두 득도한 존재로 등장한다. 이들은 사회적 통념이나 일반적 가치관, 윤리관 등 지상의 모든 제약을 완전히 버리고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이란 말을 듣는다.

그런데 이들 중 한 사람인 자상호가 죽어 장례를 치를 때 친구인 맹자반과 자금장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이들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은 친구가 ‘참됨’으로 돌아갔음을 부러워하고 자신들은 여전히 사람으로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삶의 한계에 닿은 자연스러운 변화로 유한한 존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죽음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이 아니라 죽음을 계기로 존재론적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의 긍정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장자에게 있어서 죽음으로 삶의 집착에서 해방된다는 점에서의 긍정일 뿐 죽음 자체가 삶보다 더 좋다는 평가는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다. 됨이 있으면 안 됨이 있고, 안 됨이 있으면 됨이 있다. 옳음이 있으면 옳지 않음이 있고, 옳지 않음이 있으면 옳음이 있다. 오히려 장자는 삶과 죽음의 관계를 서로 의존하는 것으로 본다. 장자는 삶이란 말속에는 죽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것처럼, 죽음이 없다면 삶도 없는 것이라 말한다.

장자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다. 이처럼 대립하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은 사실 독립적인 절대 개념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으로 인식한다. 나아가 죽음은 삶이 변화한 것이라 하며, 죽음을 부정적 대상이 아니라 삶이 변화한 모습이자 자연의 일부분으로 긍정한다.

그 사람들은 조물자와 함께하여 하늘과 땅의 일기에서 노니는 사람들. 그들에게 삶이란 마치 군살이 붙거나 혹이 달린 것과 마찬가지요, 죽음은 부스럼을 없애 버리거나 종기를 터트린 것과 같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어찌 삶과 죽음의 우열을 따지겠는가?

자상호와 맹자반, 자금장은 유가(儒家)에서 받드는 자상백(子桑伯), 맹지반(孟之反), 금장(琴張)을 연상하게 하는 인물들이다. 장자는 이들 유가 성인들의 입을 빌려 그들의 사상을 비판하고 자기의 생각을 선언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 유가에서 중시하는 예(禮)에 얽매어 살아가는데, 죽음으로써 비로소 그 얽매임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우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의 신학 코헬렛의 기본적인 사고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스스로 생겨난 자연적인 것(nature)으로서가 아니라, 예외 없는 하나님의 창조물(creature)이라고 이해하였다. 특히 전도서의 이해 속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이 현세와 내세의 이중적 차원 즉, 별개의 것으로만 표현되지 않고 장자와는 결이 다른 서로의 긴밀함으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죽음은 현세적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죽음에 대한 사유는 인간은 창조된 세계의 일부로서 그의 살아있음의 상태를 창세기 2장 7절의 야훼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에 의지해야 함을 말한다. 하나님이 그 생명의 기운을 거두면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시편 104:29; 146:4, 욥기 34:14-15, 전도서 12:7). 인간의 본질이 창조의 순간부터 선명한 선포로부터 이미 확정적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과 구분되는 인간의 본질은 창세기 2장 7절에서 질적인 면(7a절)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성(7b절) 속에서 파악된다. 먼저 질적인 면에 있어서 인간은 들의 모든 짐승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창세기 2장 19절의 동물 창조의 모습에서 야훼 하나님에 의한 동작 동사 만들다(야차르)와 질적 근원의 최종 상태인 살아있는 생명체(네페쉬 하야)에 이르기까지 창세기 2장 7절의 인간 창조와 동일하게 묘사된다.

또한, 창세기 2장 7절에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설정이다. 7b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며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생명의 기부자’로 묘사된다.

코헬렛은 이러한 창세기의 창조 신학을 바탕으로 죽음은 모든 사람이 겪는 것으로 지혜자와 우매자(전도서 2:16), 의인과 악인,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전도서 9:2) 등 모두에게 차별이 없이 다가오는 운명이라 한다.

또한, 죽음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전도서 3:19). 이 죽음은 생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전도서 6:2)이라는 점에서 인생이 죽음을 피할 길은 전혀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죽음을 코헬렛은 때에 따른 하나님의 섭리로, 장자는 명의 운행(命之行)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당하는 존재의 유한함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죽음과 삶은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인 운명이라는 점에서 코헬렛과 장자는 인식을 같이 한다.

누구나 삶이 끝나는 지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장자와는 달리 코헬렛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의지 안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생명의 완전한 종말이 되는 것으로 인간의 가치와 의미가 결여된, 어떤 면에서는 부정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어진다.

반면 장자는 죽음은 존재론적 삶의 한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죽음과 삶은 밤과 낮이 이어지는 것과 같은 전환의 현상으로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흐름이라는 것이다. 낮의 한계가 밤에 닿아 있는 것처럼, 삶의 한계에 닿은 것이 죽음이다. 따라서 삶과 죽음은 하나다(生死如 一)라는 사상이다.

반면에 코헬렛에게 죽음은 삶의 모든 의미를 무효화시키는 별개의 장치로 등장한다. 그러하기에 코헬렛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장자와의 차이를 나타낸다.

코헬렛은 죽음 또한 하나님의 ‘때’ 안에 속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도서의 키워드인 헛됨과 연결시켜 언급함으로써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의 헛되다는 성격을 강조하며 죽음의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코헬렛은 하나님이 삶과 죽음, 선과 악, 행과 불행 등 모든 사태의 원인자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 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전도서 3:11)는 코헬렛의 고백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전적으로 옳고 선하다. 따라서 코헬렛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죽음 또한 제 역할을 갖는 것을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인식되는 각각의 사건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각자의 이유와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코헬렛의 관점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인간의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명의 흐름(命之行)이라는 장자의 인식과는 다르다.

명(命)의 흐름은 복합적인 사태들의 상호작용의 결과일 뿐, 어떠한 목적과 의지가 없으므로 현상에 의미를 부여할 근거가 없다. 우주의 모든 사물과 사태는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으로 변화의 과정일 뿐이다. 죽음과 삶의 관계를 코헬렛은 죽음을 육체적 생명의 완전한 끝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음으로 생명이 끝남을 인정하면서도, 의인에 대한 ‘기억’이 칭찬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잠언 10:7). 후대의 기억을 통해 죽은 사람임에도 영향력을 여전히 이 세계에 미칠 수 있다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코헬렛은 그 어떤 ‘기억함’도 부정한다(전도서 1:11, 2:16). 지혜자의 뛰어난 철학도, 우매자의 어리석음도 죽음으로 끝이 나고 모든 이에게 잊혀 질 뿐이다(전도서 2:16)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악착같이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죽으면 그 모든 재물이 소용없다(전도서 5:15). 이처럼 코헬렛은 죽음 이후 죽은 자가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소망에 대해 부정적이다. 따라서 죽음과 삶은 완전히 분리된 실체로, 죽음과 삶은 그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는 독립적인 실체이다.

따라서 죽음은 철저히 피하고 싶은 운명처럼 여겨진다. 그러함에도, 코헬렛이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하나님의 때에 속한 것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삶과 죽음을 인간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 아래 그 뜻에 따라 인간에게 부여한 사건으로 인식한다.

코헬렛에게 죽음과 생은 하나님의 의지라는 하나의 원인에서 발생한(연관된, 혹은 원인자의 이유가 개입된) 두 사건이며, 장자는 죽음과 생을 명(命)이라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발생한 변화의 과정으로 궁극적으로 하나인 사건으로 인식한다.

코헬렛과 장자의 죽음과 삶의 관계를 이미지화 시켜보자면, 장자에게 인간의 삶과 죽음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연속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띠 위에 선을 긋다 보면 언제 앞으로 갔는지 언제 뒤로 갔는지 알아챌 수 없지만 어느새 앞과 뒤 모두에 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성이 있는 현상이다.

한편, 코헬렛에게는 양면의 종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종이의 앞 뒷면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앞면과 뒷면은 서로를 마주 보지 않고 등지고 있는 것처럼 코헬렛은 죽음과 삶은 결코 서로를 마주 볼 수 없는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 쉽게 의역하였다.
*<장자의 사상>을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북(www.youtube.com/zziraci)를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을 통하여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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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조
총신대 신대원 졸업. 세계선교교회 담임. “언어는 존재의 힘이다”는 통찰을 빌려 신학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언어로 하나님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에 대한 삶의 귀중한 자리를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