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부서 사역은 어떻게?

1989년,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미국에서 YouthWorker라는 청소년 사역 컨퍼런스가 열렸습니다.

그때 한 사역자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미국 청소년 사역은 딱, 짝귀 미키 마우스입니다. 우리는 이것 때문에 30년 뒤에 망할 것입니다.” 이 발언은 당시로는 매우 이상한 말로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1980년대는 청소년들이 교회로 몰려들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청소년 사역은 망할 것입니다.” 누가 이 사역자의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이렇게 1989년 그런 ‘짝귀 미키 마우스’ 사망 선언이 있은 지 14년 뒤, 2003년 미국 포트워스 사우스 웨스턴 신학교에서 주일학교 사역자 컨퍼런스가 열렸습니다. 첫 시간에 진행자가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미국의 주일학교는 죽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살려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으로 다시 사역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짝귀 미키 마우스를 잘 보십시오. 예전의 교회 공동체는 그림의 큰 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이 가족이었고 곧, 마을 주민들이었습니다. 우리 옛날 한국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목사님은 목사님이 아니고 이장님 같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도 집에 무슨 일 있으면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목사님, 우리 집 돼지가 새끼를 낳으려고 해요. 와서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그다음 주에 그 사람이 감사해서 교회에 나와 주고, 성탄절에 나오다가 그렇게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 안에서 교육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절교육과 직업교육이 그러했습니다. 아버지가 농부면 아들도 농부였고, 아버지가 어부면 아들도 어부였습니다. 집 안에서 자연스럽게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미국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산업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아빠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그때 처음 생긴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전에는 자녀와 같이 일하고 같이 있었습니다. 24시간 1주일 내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빠가 직업 기술을 직접 가르쳐주고 성경을 가르치고 예절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던 아빠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빠들이 공장에 일하러 가는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러자 미국 사회에 일대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아빠가 없어진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합니다. 엄마들이 모여서 공동 양육을 시작했습니다. 이 엄마는 이거를 가르치고, 저 엄마는 저거를 가르치고, 내 자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식들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따로 모으고 같은 나이끼리 모여서 가르치면서 학년이 생겨났습니다. 주제별로 가르치다가 과목이 생겨났습니다. 학년별, 과목별로 가르치다가 학교가 생겨난 것입니다. 새로운 교육 개념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누가 가르쳤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신앙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가르쳤습니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부모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다른 엄마가 가르치는 새로운 교육체계가 생각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1890년 후반에 미국에서 의무교육이란 것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게 너무 좋으니까 아예 법제화를 시켜버렸습니다. “모든 미국 국민들은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낼 의무가 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배우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가면 십계명이 있고 기도하고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배웠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교육을 했습니다. 이것을 미국의 공교육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0세기에 존 듀이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전까지 교육의 목표는 ‘어떻게 아이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길러 낼까?’였습니다. 그런데 존 듀이가 등장하고 철저한 실용주의 바탕의 교육철학으로 공교육이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찰스 다윈이 등장하면서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세상에 쓸모 있는 아이로 길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교육 목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기르던 것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자”라는 실용주의 철학으로 물든 교육목표가 등장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육은 어떻습니까? 인재 양성이 목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을 기르는 것이 목표입니까? 존 듀이는 미국 교육 철학의 아버지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실용주의, 곧 쓸모 있어야 한다.”, “실증주의, 곧 증명할 수 있는 것만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 이념을 주장하는 자였습니다. 각 급 학교에서 이런 것들만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존 듀이는 제자들을 양성했고 그의 제자들이 이후 미국 학교들의 교장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지 마라. 이슬람, 힌두, 불교도 믿을 수 있는데, 왜 모든 아이들에게 기독교만 믿으라고 하는가? 진화론을 가르쳐라. 창조론? 그거 증명할 수 있는가? 실용적인 것만 가르쳐라. 과학, 수학, 물리를 가르쳐라. 성경 과목을 없애라. 그거 배워서 뭐에다가 쓸 것인가?” 이른 바 학교 교육의 세속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집에는 신앙교육이 가능한 아버지가 없어졌고, 학교에는 신앙교육이 가능한 교사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1950년대가 되면서 전쟁 이후 세대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1910~1940년까지 미국은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니까 사람들은 희망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많이 낳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낳았느냐면, 정말 뻥뻥하고 폭탄 터지듯이 하룻 밤 새에 아이들이 미국 전역에서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폭탄 터지듯이 아이들이 태어났다고 해서, 이른바 이들을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대들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부모랑 느끼는 것이 다른 1세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최초로 세대 차이를 느끼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세대 차이(Generation gap)이란 말도 없었습니다. 느낄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늘 같이 지내고 같이 일하니까 늘 아버지 어머니랑 같이 하니까, 세대 차이를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속 교육, 학교 교육을 받은 아이들입니다. 부모와 동떨어져 살아가게 된 첫 세대이기 때문에 세대 차이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전 부모 세대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고 말도 안 통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일도 하지 않고 돈도 안 벌고 공부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렇게 10여 년간을 부모와 떨어져서 살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부모 세대와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누구도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로 “베이비부머 세대”였습니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이들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들을 “청.소.년”(adolescent)이라고 불렀습니다. 청소년이란 단어는 1950년대에 생긴 신조어입니다. 우리도 어린이란 단어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좋은 의미로 존대하기 위해 만든 단어가 “어린이”입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불렀습니까? “애, 얼라, 애새끼, 간나 등등”으로 불렀습니다.

‘청소년’, 그전과는 다른 존 듀이식 세속 교육을 받은 아이들을 일컫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세대에 대해 사회학자들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장사꾼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대들은 동질 집단이었습니다. 같은 나이, 같은 교육, 같은 가치관을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전 부모들은 어떻게 살았다고 했습니까?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살았습니다. 그들의 부모, 이모, 삼촌, 동생들, 누나, 형, 언니, 오빠, 할아버지, 할머니, 동네 아저씨, 아줌마 등등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러한 부모 세대들에게는 세대 차이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문화를 같이 누리며 살았고, 부모님들의 사는 모습을 보며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문화 가치들을 보고 배웠습니다.

어른들과 같이 있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늘 함께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이비부머 세대들, 당시 청소년들 1세대들은 항상 또래 같은 나이끼리만 쭈욱 살아왔습니다. 늘 친구들끼리만 지내왔습니다. 그러면서 또래 문화가 생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