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도 정말 전쟁을 하네요!”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점심을 같이 하려고 둘러앉으니, 나이 드신 집사님이 걱정스레 말씀하셨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식이 나온 후 설마 했다고 하시면서.
지구상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 왜 인류는 항상 전쟁의 위험 속에 놓여있을까? 한 마디로 인간의 욕심, 탐욕 때문이 아니겠는가? 남을 지배하려 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또 빼앗긴 것을 되찾아야 한다는 등의 명분으로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전쟁에 대하여 크게 3가지 견해로 본다. 평화주의(Pacifism)는 어떠한 전쟁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며, 대의전쟁론이라고 하는 성전론(聖戰論, Holy War Theory)은 십자군 전쟁과 같은 분명한 목적을 내세운다. 정당전쟁론(正當戰爭論, Just war theory)은 몇 가지의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정당한 원인, 단순한 복수의 목적이 아닌 평화를 회복하려는 의도, 정의 수호, 합법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승리의 가능성, 민간인과 포로에 대한 보호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묻는다.
이런 여러 가지 전쟁의 정당성을 말한다고 해도 전쟁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실제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이런 정당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어린이 시설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건물에도 포격하고 있다.
성경에서의 전쟁
성경에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어쩌면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탄의 모습도 영적인 전쟁이다. 가인의 형제에 대한 시기와 살해 등도 싸움이며 아브라함 이후 가나안 정복과 예루살렘 함락에 이르기까지 구약 성경의 대부분은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빼곡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매우 조심해서 사용해야 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성전(聖戰, Holy War)이 그렇다. 사실 이 말은 인간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용어이다. 하나님은 인간사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사람들의 정치적 상황 속에 개입하셔서 다스리신다. 이런 과정 속에서 심판하시기도 하고 책망하시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쟁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에 나타나는 전쟁이며, 인간을 구속하시는 한 단면이다. 그 모든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전쟁으로 끝내셨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이르러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성전(聖戰, Holy War)이라는 전제로 전쟁을 치렀던 십자군 전쟁은 그래서 인류에게 남긴 것은 기독교 역사의 수치와 신학적 깊은 오류만 남겼다.
고려를 침공하였던 몽골의 쿠빌라이 대칸은 전쟁을 가리켜 미래라고 했다. 그의 미래로서의 전쟁은 중국, 아시아를 점령하고 유럽으로 뻗어갔으니, 교황 우르반 2세나 쿠빌라이 대칸은 그야말로 전쟁이 곧 종교였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3장 제2절(국가 위정자(爲政者)에 관하여)은 칼뱅의 기독교 강요 제4권 제20장 11절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공직자로 부름 받을 때, 그것을 맡아 수행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그들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 나라의 건전한 법에 따라 하되, 특별히 경건과 공의와 평화를 유지하여야 하며,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의 신약시대에도 정당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합법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전쟁은 분명 악한 것으로 안 하는 것이 좋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쟁은 생명과 삶에 말할 수 없는 큰 손실을 가져오며 수많은 고아와 과부를 양산해 내기에 절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복음으로 평화를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두 개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는 항상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역시 전쟁이라는 현실에 직면할 수 있다.
세상은 악하여서 완전한 평화를 기대할 수 없으며, 러시아의 푸틴처럼 누군가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킨다.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나라이면서도 또 이웃의 땅을 탐내고 있으니,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은 그 어떤 것으로도 찾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기 방어로서의 전쟁을 포기할 수 없다. 이렇게 자기 방어로서의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경우에 그리스도인 군인은 마땅히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그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와 민족을 지키고자 하는 행위이며, 더 이상의 살인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최선의 조치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이로든지 직간접으로 도움이 필요하다.
공권력이 폭력이 되면 저항해야 하고, 국제적 침략이 있으면 방어가 필요하다.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 혁명은 기독교인의 저항권이었으며, 미얀마를 비롯한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회 운동에 있어서도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지켜 내기 위해, 또는 그리스도인다운 방법으로 저항해야 한다.
포화가 계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그야말로 탈출이 러시를 이룬다. 지금까지 약 350만 명이 이웃나라로 피난한 상태요, 여러 국경 도시에는 기독교 봉사 단체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전쟁은 배고픔과 이별 등의 아픔을 가중시킨다. 우크라이나에서 사역하고 있는 친구 선교사는 코로나 사태로 아직도 들어가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면서도 현지인 선교팀으로 하여금, 피난민들을 위한 구호활동, 주일학교 사업, 무료급식 들을 원격지원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전쟁터에는 사랑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