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김성열 목사<어린이전도협회>

지금 우리가 예배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느끼고, 정서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8편은 자연에 드러난 하나님의 손길과 그분의 존재를 인식하고 고백하는 다윗의 시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자연환경은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물들이며, 그분의 일하고 계심의 결과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 종일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또 자신과 연관된 일들에 너무 골몰해 있기 때문에, 환경과 자연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손길과 그분의 존재를 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의 삶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암암리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일관되게 우리의 삶에 흐르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우연” “행운” “다행” “재수” 또는 “…덕분에”라는 이름으로 치부하고 넘어가 버리기에 하나님의 존재나, 그분의 일하시는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손 닿는 곳에 존재합니다.

내 문제가 기적적으로 해결되고, 나쁜 일이 좋은 결과로 끝날 때만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공간이 나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요 관심이라는 인식을 꾸준히 유지할 때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사고가 3절과 4절에 드러나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유진 피터슨 목사가 번역한 메시지 성경은 4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걱정하시고 우리 인생길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살뜰히 살피십니까?”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습니까? 다윗은 그 벅차오르는 감동으로 두 번씩이나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시 메시지 성경을 인용하면 이런 고백입니다. “하나님, 찬란히 빛나는 주님, 주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메아리칩니다.”

우리는 왜 온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는 그 메아리를 잘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코로나나 재해나 비극적인 어두운 소식들에만 귀가 밝은 것일까요? 우리가 고민하고 반성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성취했는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가 보다 내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인식하며 살고,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는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일상의 시공간에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응답하며 그분의 사랑의 농도를 더 깊이 알아가고 그 사랑 때문에 내가 그분을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계급장처럼 여겨지고, 때로는 커다란 짐처럼, 때로는 가면처럼 느껴지는 우리의 이름 앞뒤에 붙어있는 직분의 수식어와 타이틀을 떼고, 순전한 하나님의 어린 자녀로서 그분을 만나 마음을 쏟아 놓고, 그분을 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누가 천국에서 큰 자인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천국의 주인인 하나님의 자녀들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주님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어른이 아이가 되면 그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고 심각한 치매 증상입니다. 제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한 바로는 어른이 되면서 나도 모르게 들러붙은 순수하지 못한 욕심이나 야망이나 교만이나 죄나 습관 같은 것 들로부터 돌이켜 어린아이 같은 순순함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가 많고 공부를 많이 해서 학식이 있고 사회적 명성을 누리는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저 사랑하는 자식일 뿐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타이틀이 아니고 그 관계를 누리는 것이지요. 그분과의 관계를 더 깊이 발전시켜 가는 것이요,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며, 그분의 사랑을 누리고 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때로는 목회나 사역에 대한 극심한 열심이 하나님을 보는 우리의 시야를 좁힐 수도 있습니다. 일이, 사역이, 목회가 우리의 눈꺼풀에 씌워지면 우리는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이나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일에 성과를 낼 수 있고,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고 소위 말하는 목회 성공을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는 그 일이 내 일이 되고, 그 결과는 내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과 함께 시작한 사역이나 목회인데 잘 되가니 하나님을 떨궈버린 셈이지요.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위험을 방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오늘 고백하는 다윗처럼 일상의 자연의 꽃이나 나뭇잎이나 새나 땅에 기는 곤충 등 소소한(?) 것에서 주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감탄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연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잘 아는 C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주에는 중립지대란 없다. 매 평방 제곱 센티 미터, 매초는 하나님의 소유로 주장되거나 사탄의 소유로 주장된다.”

내 삶의 환경이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되느냐? 사탄의 소유로 인정되느냐는 우리가 매 장소 매시간마다 누구를, 무엇을 의식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하나님의 것이지만 거기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소유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리고 그곳은 천국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 계신 곳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보는 뉴질랜드는 천국과 같습니다. 뉴질랜드를 다녀간 어떤 분이 제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뉴질랜드가 참으로 아름답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천국을 만드실 때 어쩌다 두 조각이 땅에 떨어졌는데 그래서 만들어진 게 뉴질랜드의 남섬과 북섬인 것 같다”고요. 그분이 보기에 정말 그랬을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입니까? 그러나 불행히도 천국처럼 보이는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지옥 같은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이곳에 사는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공원에 와서 부부 싸움을 하면 이곳이 지옥이 되는 것이고, 초라한 길도 사랑으로 충만해서 손을 잡고 걸으면 그곳이 천국이 됩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공기보다 더 가까이 우리의 삶에 관여하시고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신비적인 방법으로만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 속에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그분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임재를 알리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감동시키시려고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사로라도 그분께 찬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찬란히 빛나는 주님, 주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메아리칩니다.” 함께 고백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