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브루타는 유대인교육법 아닌가요?”

하브루타에 대해 알아보면서 나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유대인들은 하브루타를 어떻게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렀을까?”와 다른 하나는 “유대인 교육법으로 알려진 하브루타를 오늘날 기독교 교육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였다.

I: 목사님! 지난번에 거의 모든 원시문화는 하브루타를 활용한 교육이었다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P: 좋은 질문일세. 하브루타는 유대인의 ‘탈무드 논쟁’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어. 유대인들은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권력과 자기 자신을 부패하게 만든다”라고 하는데 그 말은 기존의 전통, 가르침, 관습들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며 더 정확하게 이해하라는 말 일세. 그래서 유대인들은 토라와 탈무드를 배울 때 치열하게 질문한다네.

I: 그럼 토라와 탈무드의 배경을 알면 하브루타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겠네요?
P: 그렇지. 유대인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토라로 구전으로 전한 율법을 미쉬나로 불렀다네. 구약성경 전체를 토라로 부르기도 하지만 조금 더 분류하면 세 개로 나눌 수 있어.

율법서 토라, 예언서 네비임, 그리고 성문서 케투빔이야. 그들의 첫 글자를 따서 ‘타나크’라고 부른다네. 남왕국 멸망 이후 사람들은 율법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시 율법에 열심을 갖기 시작했지. 선지자 에스겔을 중심으로 장로들이 모여 기도하고 토라를 공부하기 시작했어.

그 모임에 학사 에스라도 동참하면서 ‘위대한 모임’이 되었고, 그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을 ‘아모라임’이라고 불렀어. 그들은 구전으로 전해진 미쉬나와 그것에 대한 토론을 담은 ‘게마라’라는 해석집을 만들었어.

미쉬나가 율법의 정신을 담은 의견을 나열했다면 ‘게마라’는 토론 시리즈라고 보면 돼. 시간이 지나면서 본문 해석에 대한 분석, 재해석이 일어나면서 오늘의 탈무드로 발전한 것이지. 그래서 탈무드 안에는 토론, 주장, 반박과 같은 학습요소들도 포함되어 있어.

I: 그런데 목사님!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의 역사와 교육 방법론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요?
P: 좋은 질문일세. 자네는 오늘날 기독교의 예배나 찬송, 그리고 세례와 같은 예전이 언제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나?

I: 초대교회 때부터 아닌가요?
P: 오늘날 우리 교회의 전통은 초대교회에서 왔지만, 초대교회는 유대교의 전통을 따랐다네. 우리가 하브루타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해. 첫째는 ‘예수님이 율법에 대해 어떻게 보셨는가?’이고, 둘째는 우리가 율법이나 유대인의 전통을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 그리고 셋째는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일세.

I: 예수님은 율법을 어떻게 보셨나요?
P: 구약학자가 아닌 기독교 교육학자의 시선으로 보면 율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네. 영원히 지키도록 가르쳐야 할 것과 의미를 가르치되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 예를 들어 제사법은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라졌어.

하지만 십계명과 같은 율법은 영원히 가르쳐야 해. 주일과 안식일의 차이는 더 이상 얘기 안 해도 되겠지? 예수님은 율법을 부정하신 것이 아닐세, 율법의 정신을 왜곡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비판하신 것 일세.

예수님은 그들이 왜곡한 율법을 재해석해 주셨지.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의 개념, 살인과 간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 등으로 말일세.

I: 그렇군요. 그럼 우리가 유대인의 전통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나요?
P: 두 가지로 생각해 보면 어떤가? 오늘날 기독교 예전의 형태는 대부분 유대교에서 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해. 오늘날 교회가 뭔가 많이 바꾼 것 같지만 기본적인 형식은 여전히 유대교의 회당과 유사한 측면이 있어.

하지만 영원한 규례로 표현된 어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필요는 없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은 세상의 모든 지식이나 기술은 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관점일세.

의술이나 첨단과학이나 자동차와 같은 여러 가지 도구들도 포함된다네. 자네는 자동차 타고 다니지 않나? 아프면 병원가고.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유대인들에게서 온 것이라고 색안경을 낄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I: 그럼 교회에서 하브루타만 고집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요?
P: 물론이지. 하브루타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 중의 하나로 보아야지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면 갈등과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I: 그럼 오늘날 교회에서 하브루타를 어떻게 지혜롭게 사용해야 할까요?
P: 유대인들은 지혜라는 것을 세 가지 측면으로 이해한다네. 배우지 않았지만 배운 것처럼 알고, 경험하지 않았지만 경험한 것처럼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네.

그 과정에서 지식은 지혜의 샘을 터트리는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하지. 따라서 하브루타는 지식만 구겨 넣고 얼마나 넣었는지를 평가하는 교육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마중물을 토대로 지혜를 채굴하는 광부를 만드는 교육일세. 자 그럼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하려는 일의 근본적인 물음으로 들어가면 어떤가?

I: 우리가 하려는 일의 근본적인 물음이라뇨?
P: 우리가 하려는 일이 잘 가르치려고 하는 것 아닌가? 자네는 가르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I: 예전에 학교에서 배운 것이 생각납니다. 맹자의 진심삼장에서 교육이란 말이 처음 나왔는데, 교(敎)자가 본받을 효+아들 자+두드릴 복으로 이루어져 ‘아이가 본받도록 토닥여준다’는 것이고 육(育)은 돋아날 돌+고기 육으로 ‘아이가 잘 자라도록 한다’는 말 아닌가요?
P: 잘 기억하고 있군. 우리 말로 ‘가르친다’는 의미도 있지. ‘가르친다’는 말은 ‘갈다(가르다)’+’치다’로 나뉘지. ‘갈다’라는 말은 딱딱하고 굳은 것을 부드럽게 해준다는 것이고, ‘가르다’는 것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한다’는 의미가 있지. 또 ‘치다’는 것은 양이나 소를 ‘치다’ 처럼 잘 자라도록 ‘돌봄’의 의미가 있네. 어떤 부모들은 ‘치다’를 ‘때리는 것’으로 이해해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

I: 그럼 지난번 소통에서 말씀하신 영어의 education과 어떻게 다른가요?
P: 내 생각엔 리처드 니스벳이 ‘생각의 지도’에서 밝혔듯 동양인과 서구인의 ‘사고의 차이’, 또는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하네. 동양인들은 많이 가르치고 알려주는 것을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서구인들은 많이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이끌어내어 실용적인 것을 하도록 하는 것을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I: 그럼 ‘유대인 교육’은 어떤가요?
P: 유대인들은 많이 가르치고, 심지어 어렸을 때부터 모세오경을 암송해야 한다네. 하지만 그들이 암송하는 이유는 성경을 집어넣기 위해서가 아닐세. 하나님의 말씀이 차고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안으로 쌓일 뿐만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서 지혜의 삶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해. 하브루타가 결정적인 매개이고.

I: 그럼 하브루타는 동양과 서양 교육의 장점들을 두루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P: 그렇게 볼 수도 있지.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군. 오늘은 “우리가 왜 유대인 교육법을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 해결되었다면 다음 주엔 하브루타의 3요소인 ‘질문’, ‘말하기’, ‘스스로’에 대해 알아올 수 있겠나?

그동안 유대인 교육을 오늘날 교회 교육에 접목한다는 점에 대해 부담을 느꼈는데,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다’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니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져서 마음이 한결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