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C 단조, 작품 18번

“내 안의 나를 꺼내지 않으려/ 발버둥 쳐대는 격렬한 몸짓/ 흔들리는 감정 그 테두리/ 그 속에 가두어 버리고야 마는/ 슬픈 영혼의 터널에서/ 그렇게 또다시 시작되는 하루/ 어느새/ 우울이 나를 안고 있었다”(김수현의 시, ‘우울 그 즈음에’ 중에서)

라흐마니노프의 2번 피아노 협주곡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시구(詩句)입니다. 시인은 우울을 ‘내 안의 나를 꺼내지 않으려 발버둥 쳐대는 격렬한 몸짓’이라 표현하였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음악가 라흐마니노프가 이 우울에 안겨 발버둥 쳐댔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창 피가 끓어오를 나이인 24살 때, 190cm의 큰 키에 거구인 라흐마니노프가 우울에 사로잡혀 무기력한 절망의 늪에 빠져 꽤 오랜 기간 헤어 나오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evich Rachmaninov, 1873~ 1943)는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며 또한 지휘자입니다. 러시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다른 유명한 음악가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일찍 재능을 드러내서 네 살 때 자청해서 피아노를 배웠고 10대부터 작곡을 했습니다.

약관 18살 때인 1891년에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작곡했고 1895년에는 첫 교향곡 D 단조를 작곡하여 1897년에 글라주노프(A. Glazunov)의 지휘로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만만했던 이 교향곡은 기대와 달리 엄청난 혹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비평가는 “모세가 이집트에 내린 재앙” 같은 곡이라고까지 비판했습니다.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이때부터 우울증에 빠져 허덕이며 3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작곡 활동을 못 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살까지 시도했습니다. 김수현 시인의 말대로 ‘내 안의 나를 꺼내지 않으려 발버둥 쳐대는 격렬한 몸짓’만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울을 이겨내고 작곡한 곡
그러던 중 친구의 권고로 최면요법의 명의인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Nikolai Vladimirovich Dahl) 박사를 만났습니다. 음악을 좋아하고 뛰어난 아마추어 비올라 연주자였던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최면요법과 심리요법을 더불어 시행했습니다.

달 박사는 그에게 “당신은 피아노 협주곡을 쓸 것입니다. 당신은 아주 잘 해낼 것이고 그 협주곡은 정말 훌륭한 곡이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고 합니다. 달 박사의 치료는 성공적이어서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작곡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첫 곡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입니다.

우울과 절망 속에 빠져있던 자신을 구해준 달 박사에게 진심으로 감사했기에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달 박사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는 달 박사와의 치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의 치료는 정말 도움이 되었다. 내 안에서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가 들끓게 했고 나는 작곡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통해 우울과 무력감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자신감을 회복하였습니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의 작품 중 최고의 걸작이며 음악사에서 후기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며 이 곡을 작곡하기 시작한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의 2악장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느리고 서정적인 2악장은 이 곡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다음에 3악장을 쓰고 1악장은 마지막에 작곡해 곡을 완성했습니다.

작곡 과정도 특이했지만 이 곡에는 우울증을 겪으며 그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응어리가 곳곳에 담겨 있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이 곡을 들으면 마음의 평안을 회복합니다.

이 곡이 발표 당시에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1901년 10월 26일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독주 피아노와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치러진 초연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확고한 작곡가의 위치를 확보했고 이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은 많은 사람에게 쉽게 친해질 수 있는 곡이 되었습니다.

영화 속의 클래식으로 더 유명해진 곡
이 곡은 많은 영화에서 주제곡 또는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어 클래식을 잘 모르는 대중들에게까지 가까워졌습니다.

명장 데이비드 린(David Lean)이 감독한 1945년의 영국 영화 밀회(원제 Brief Encounter)에서 내내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이 곡은 평범했던 가정주부 로라의 잠깐이지만 위태롭기만 한 사랑을 절절하게 표현해 줍니다.

사랑의 방황을 끝내고 다시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로라의 모습은 어쩌면 우울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찾는 라흐마니노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곡은 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도 적절히 사용되었습니다. 마릴린 먼로가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뉴욕 지하철 환풍구 위에 서서 하얀색 드레스를 요염하게 날리고 있는 장면으로 유명한 이 영화에서 이 곡은 코믹한 장면에서 사람들에게 유쾌한 웃음을 선사해 줍니다.

이 이외에도 ‘호로비츠를 위하여(2006)’와 ‘도쿄타워(2004)’ 등 여러 영화에서 이 곡이 나옵니다. 그만큼 이 곡이 다른 클래식에 비해 대중이 가까이할 수 있는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곡의 특징과 구성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가 그 특성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곡들을 작곡했는데 이 곡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표현양식에 있어서는 낭만적인 선율이 러시아의 국민성과 슬라브적인 색채를 반영하며 고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작품으로 모두 3악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1악장 Moderato 소나타형식으로 도입부에서는 `크렘린의 종소리’를 회화적으로 들려주며 듣는 이가 귀를 기울이도록 만듭니다. 1악장을 맨 끝에 작곡했다는데 이 종소리는 우울에서 벗어나 다시 재기하는 작곡가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러시아 냄새가 나는 전개부를 지나면서 비올라에 이끌려 피아노가 단독으로 연주하는 선율은 달콤하며 감상적입니다.

제2악장 Adagio sostenuto 반음계적인 서주로 시작되며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서정성이 넘쳐납니다. 약음기를 붙인 현과 클라리넷, 파곳, 호른, 플루트와 더불어 피아노가 3잇단 음의 분산 화음으로 감미롭게 노래하며 낭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가장 인기 있는 악장입니다.

제3악장 Allegro Scherzando 씩씩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중후함 속에서 장대한 악상을 펼쳐 보이는 악장입니다. 호쾌한 리듬으로 피아노가 눈부시게 열정적인 악상을 전개하면서 장대한 합주로 전곡을 마무리합니다.

리히터(Svjatoslav Richter)의 명연주
이 곡은 리히터가 피아노를 맡고 Stanislaw Wislocki가 지휘를 맡은 바르샤바 국립 관현악단의 연주로 들어야 곡의 진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리히터의 강한 터치는 아름다운 감성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비슬로키가 이끄는 바르샤바 국립 관현악단의 기량도 나무랄 데 없어서 러시아적 감흥과 낭만을 만끽하게 해줍니다.

음악 감상 뒤에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요한복음 14장 27절이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걱정과 근심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우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우리 주님뿐입니다. 그분에게 의지할 때 참 평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코로나로 어렵고 힘든 요즈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끼치시는 평안 속에서 모두 건강하시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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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