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연과 오한협 주최 조찬기도회

제공_오장연

2022년 국가와 민족 위한 조찬기도회 다시 열려

2022년 임인년 새해를 맞이하여 뜻깊은 신년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한국에서는 1966년부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가 CBMC(기독실업인회) 주최로 대통령을 비롯해 국가 지도자들을 초청해 매년 열리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민 초기인 1995년부터 오클랜드 총영사관에서 매년 진행되다 멈추어졌던 조찬기도회가 2019년 다시 오클랜드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이재오 목사, 이하 오한협)와 오클랜드 장로연합회(회장 이현모 장로, 이하 오장연) 공동주최로 부활하여 2020년 2회까지 열렸다.

2021년 작년에는 코로나 사태로 중지되었다가 올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들교회(이재오 목사)의 섬김으로 재개된 것이다

지난 1월 21일 금요일 아침 7시, 오클랜드 노스쇼어의 우리들교회에서 개최된 조찬기도회는 오클랜드 장로연합회(회장 선성훈 장로)와 오클랜드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이태한 목사)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와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중보하고, 오클랜드 교계의 중심이 되는 두 단체가 연합해 주님 기뻐하시는 일들을 해나갈 것을 결단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 제목에 따라 다같이 기도하는 목사와 사모 그리고 장로

오한협 서기 최요한 목사의 사회로 시작된 이번 조찬기도회는 오장연 회장 선성훈 장로의 대표 기도, 찬송가 아침 해가 돋을 때(552장), 이어서 오장연 총무 안재홍 장로의 마태복음 5장 16절 성경 봉독에 이어 오한협 회장 이태한 목사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란 제목의 말씀이 선포되었다.

이어 오한협 총무 유명종 목사가 인도하는 중보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감사와 회개의 기도’ 김재덕 장로, ‘뉴질랜드와 대한민국을 위한 기도’ 오한협 부회장 고창범 목사(선한이웃교회), ‘코로나바이러스 종식을 위한 기도’ 문홍규 목사(글렌필드커뮤니티교회), ‘오클랜드 교회와 영적 지도자 위한 기도’ 우신득 목사(남태평양 다민족교회). 그리고 ‘새로운 2022년의 부흥과 도약을 위한 기도’ 이달견 목사(빅토리처치)등 대표 기도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어서 이현모 장로(오장연 직전 회장)의 감사 인사와 광고, 마지막으로 이재오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우리들교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아침식사 나누며 하나님이 행하실 일 기대하고 교제 가져

예배 후에는 우리들교회에서 정성껏 준비한 아침 식사를 나누며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맞이한 올 한해도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대화를 나누는 화기애애한 교제로 이어졌다.

조찬기도회 설교<이태한 목사/오한협 회장, 갈보리교회>

오한협 회장 이태한 목사가‘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제목으로 설교

마태복음 5장16절로 팬데믹 영향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 살펴봐

마태복음 5장은 산상수훈의 시작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씀대로 살아가려면 실천하기 어렵고 고통스러움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는 것과 그대로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여 액자 속의 글처럼 보고 즐기는데 그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여는 시간에 그리스도인답게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창궐했던 전염병에 대한 그들의 대처를 통해 코비드19과 여러 어려움으로 고통 중에 있는 세상을 향해 교회를 이끌어 가는 우리가 어떤 행실로 그들을 섬겨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가를 점검해보겠습니다.

팬데믹의 역사
먼저, 전염병의 역사를 요약하자면, 코로나와 같은 세계적인 전염병으로 인한 펜데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첫 펜데믹은 1968년 홍콩 독감 때이고 두 번째 팬데믹은 2009년 신종인풀루엔자 때 선언 되었습니다. 전세계 경제와 정치 그리고 일상의 삶을 위기로 몰아넣고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있는 역사적인 대규모 세계적 전염병은 그때마다 인간의 문명과 역사를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전염병
로마 제국은 각 세기 마다 창궐한 전염병으로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165년 발생한 역병은 로마 군대가 페르시아 원정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원정길에서 옮겨진 ‘두창’(천연두)이 발생하여 169년 로마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가 사망합니다. 180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천연두로 사망합니다. 이처럼 고대 사회에서 전염병이 창궐한 것은 전쟁의 영향이 큽니다.

로마는 전쟁으로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기는 했으나 그 반대급부로 전염병은 피할 수 없었으며 전염병을 피하고자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면서 자연히 농업 생산성이 저하 되었고,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도시화는 준비 부족으로 국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중세의 전염병
중세의 몰락을 부추긴 것도 전염병인 ‘페스트’입니다. 1347년부터 1350년에 걸쳐 당시 유럽의 인구 1/3의 사망자를 내면서 인구 변화와 경제와 문명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 전염병은 봉건제도를 지탱하고 있던 영주들 및 계급 사회였던 중세 유럽의 구조를 송두리째 흔들었으며 사회 질서와 경제의 흐름, 개인의 가치관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특히 급격한 인구감소로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하였고 이로 인한 과도한 임금 인상은 농노들의 지위 상승을 부추겼으며 반대로 영주들은 파산하게 되면서 봉건제도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시장 무역과 경제가 활발해지면서 상인과 장인의 힘이 커지면서 자본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고 이런 변화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 토양을 쌓았습니다.

스페인 독감
1918-1919년에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코로나19처럼 폐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면서 5,000만 명까지 사망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사망자가 900만명이라는 통계로 볼 때 사망자가 어느 정도인가 짐작하게 됩니다.

스페인 독감은 우리 한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조선에는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2차 확산 시기인 1918년 9월경에 집중 발병했다. 당시 조선 인구의 44%에 해당하는 742만명이 감염되어 약 14만명이 사망했다.

”스페인 독감은 1919년 초 조선총독부의 독감 방역 실패와 경제 마비로 조선인의 불만을 촉발시켜 3.1 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렇듯 전염병의 힘을 실감하는 역사적 선례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전염병에 대한 대응과 그 영향
이교도의 대응
전염병이 극성을 부리던 당시 이교들의 대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이교도들은 역병에 걸린 환자들로부터 멀리 도망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특히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사제들, 로마 정부의 고위층들과 부자들이 로마를 떠나 피신하므로 로마 사회는 무질서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둘째, 이교도는 전염병의 원인을 기독교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소문을 퍼뜨리며 민심을 자극시켰고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교도의 가짜 소문에 편승하여 기독교인에게 무자비한 핍박을 자행했습니다. 이렇듯 초대교회는 이교도의 허위 소문에 역병의 원인제공자로 내몰려 신앙의 박해와 함께 이중고의 핍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기독교인의 대응
전염병이 로마에 한창 기승을 부릴 때 기독교인은 네 가지 방법으로 반응했습니다.

첫째, 전염병의 재난을 죄의 결과로 보며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가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카르타고의 주교인 ‘키프리아누스’는 전염병을 고통을 죄의 결과로 받아드려 전염병을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이 무조건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둘째, 기독교인은 전염병에 고통 당하는 이웃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자신도 전염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가 간호하는 섬김의 실천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이웃이 역병으로 고통 당하고, 헐벗고, 병들었을 때 사랑과 구제를 몸소 실천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셋째, 기독교인은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신했습니다. 역병이 절정에 달했던 260년 부활절에 알렉산드리아 주교인 ‘디오니시우’는 “우리 형제 대부분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보살폈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으며 주님 안에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병이 감염되자 그 아픔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환자들을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았습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이렇게 역병에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환자를 돌보다가 전염되어 죽음에 이르더라도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기독교인은 전염병 앞에서 삶을 점검하였습니다. 전염병 앞에서 기독교인은 체념이 아닌 일상의 삶을 돌아보면서 악에서 떠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횡행했던 목욕문화를 거부하며 신앙적인 거룩을 지켰고 노예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피를 흘리고 죽이고 하는 원형 경기장을 찾는 일을 삼가하여 그것이 비록 오락 문화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공공연한 사회적 문화를 거부하여 생명 존중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기독교 대응의 영향
초대교회 당시 전염병은 로마 제국에게는 악재로 작용했지만 기독교인에게는 기회였습니다. 영토 확장에 사활을 걸고 있었던 로마 제국은 점령하는 곳마다 제국의 영토로 복속 시켰지만, 로마 군인들이 점령한 땅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염병인자는 독이 되어 로마 제국을 서서히 침몰 시켜 엄청난 사망자를 초래 했으나 이런 재난 가운데도 초기 기독교인의 신앙은 오히려 담대 했고,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교회의 본질을 지키다 보니 역병으로 로마제국의 인구가 감소했음에도 교회는 성장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첫째, 기독교인 사망률은 감소한데 비해 출산율은 증가 했기 때문이고 둘째, 기독교인의 헌신에 개종자들이 증가했습니다. 역병이 돌 때까지만 해도 이교도와 기독교인과의 관계는 증오 그 자체였으나 이교도들은 기독교인들이 죽음(순교)에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죽음의 현장에는 항상 기독교인이 있었고 환자를 돌보다가 병이 옮아 죽어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이교도들의 선입견을 바꾸기에 충분했고 기독교인의 도움으로 살아난 생존자들이 속출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증오에서 사랑의 관계로 바뀌면서 자연히 개종자가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을 강타한 전염병은 오히려 교회성장을 견인하는 결과를 가져 왔는데 이것은 초대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고, 각 지체는 다투지 않고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는(고린도전서 12:26-27), 역병을 만났을 때 이웃 환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기쁨으로 다가가 돌보며 간호했던 모습은 이방인의 마음을 울렸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쾌락을 좇아가지 않고 삶을 재정비했던 모습은 이방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 역병 가운데 기독교인과 이교도 간의 관계는 견고 해졌습니다.

코로나19와 마주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의 전염병 대응을 거울로 삼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존재 방식- 다시 성육신적 섬김으로 돌아가야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은 구별과 환대입니다. 그 두 가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수님의 교훈은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구별은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환대는 교회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인데 한국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점을 드러내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세상의 고통을 이해하고 환대하려는 노력은 부족하여 고립을 자초하는 바리새인이 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전염병이 로마제국에 청궐했을 때 슬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천국의 비전을 제시하고 환대의 정신으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다가 자신이 병에 걸려도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고 심지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성육신적 삶의 유형을 보여주었습니다.

‘파라볼라노이’ 즉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초대 기독교인들은 살아 내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자세는 당시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자세와 비교할 때 뚜렷하게 다른 성육신적 삶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 세리, 과부, 등 약함을 가진 자를 모두 사랑하시고 용서, 치유, 화해를 주시기 위해 성육신 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나타내셨 듯이 교회도 하나님의 성품을 우선적으로 나타내어야 합니다.

비록 성육하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완벽하게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에서 삶에 반드시 적용해야 할 중요한 영적 원리 즉 ‘예수의 마음 품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가르쳐 온 핵심 가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가르침이 아니라 실천이고 나눔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사랑이 가르침만이 아닌 실천이고 나눔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그 나눔을 다양하게 펼쳐야 하겠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묻어나는 성육신적이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로마를 정복한 것은 온 몸에 십자가를 휘감고 불신지옥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 살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 즉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거룩한 삶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16절에서 말씀하는 착한 행실이고 이 착한 행실이 사람들에게 보일 때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 장로들이 먼저 이렇게 살고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섬김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라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