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엄마는 신과 같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어설픈 나를 전적인 믿음으로 붙들고 있는 은율이를 보며 크게 웃는 남자가 둘 있으니 바로 친정아버지와 남편이다.
나는 원래도 좀 마른 편인데 육아를 하며 체중이 줄어 한눈에 보기에도 비실이로 보인다. 네 살의 은율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남편은 “애가 너보다 더 크다.”고 할 정도였다.

아이 같은 당신의 막내딸을 손녀가 ‘엄마! 엄마!’ 하며 쫓아다니고 매달리는 모습이 신기하신가 보다. 은율이가 나에게 매달려 얼굴을 비비는 것을 보시며 “쓰러질 것 같이 마른 엄마를 어쩜 저렇게 한없이 믿고 매달리냐.”시며 웃으신다.

사실 이 두 남자의 웃음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대학 시절 “언니!”, “누나!”라고 부르는 후배들의 소리조차 어색했던 나였기 때문이다. 나와 달리 맏이로서 원래 아이를 좋아했던 남편은 갓 태어난 은율이를 안고 젖을 먹이며 병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은율이 좀 안아봐.”

회복실에서 엄마와 언니, 그리고 남편이 번갈아 가며 아이를 안았는데 나는 그때까지 은율이를 안아보지 않았다. 젖병을 물리며 희열에 찬 표정으로 사진이 찍힌 것도 내가 아닌 남편이 먼저였다.

태교를 열심히 했던 나인데도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이 몸에 배지 않아서인지 아기를 안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1박 2일의 산고 끝에 수술로 아이를 낳느라 진이 빠져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퇴원 전 아기를 포대기에 싸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너무나 조그마한 아기를 진찰하려고 선생님은 배내옷을 벗기셨다. 차가운 청진기가 닿자 조그마한 몸이 파르르 떨리며 아기는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온몸을 통과하는 듯한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몹시 가슴이 아팠다. “엄마, 선생님이 검진한다고 청진기를 대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 나의 문자에 친정엄마는 이런 답을 보내오셨다. “그 감정을 절대 잊지 마라.”

조리원에 같이 입소한 남편은 우리를 두고 바로 출근했다. 분홍색 침대가 있는 작고도 조용한 방에 아기와 단둘이 남았다. 산통과 입원, 그리고 수술. 며칠의 시간이 꿈만 같았다. 아무도 없이 단둘이 아이와 있긴 처음이었다.

은율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이라 “미라클~” 하며 태명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핏덩이 같은 아기가 버둥버둥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울음을 왈칵 터뜨렸다.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첫 탄생의 순간에도 울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이와 내가 단둘이 있던 그 순간, 방 안의 공기 냄새까지 너무나 생생하다. ‘내가 이 아기의 엄마구나. 내가 이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구나’라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솟아올랐던 기억이 난다. 친정엄마나 언니, 다섯 살 연상인 남편이 없자 비로소 그런 감정을 느낀 것 같다.

그 감정이 모성애라면 그렇게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다. 육아와 살림을 하는 이런 부지런함과 에너지로 인생을 살아왔더라면 대성공을 했으리라고 말이다. 그만큼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나는 심한 방향치다. 어느 정도인고 하니 일단 처음 가보는 빌딩은 들어갔다가 나오기만 하면 방향을 못 찾는다. 버스나 지하철을 잘못 타는 일은 일상이다. 은율이와 외출했을 때 길을 못 찾아 뱅글뱅글 도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은율이는 내가 길치라는 것을 모른다. 현재 같은 곳을 계속 돌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 한다.

“엄마가 지금 길을 못 찾아서 헤매고 있거든. 기도 좀 해 줘.”라고 하면 “응!” 하고는 연신 싱글벙글한다. 엄마랑 외출한 자체가 마냥 좋은 것이다.

건망증도 심한 편이다. 남들에게는 민망해서 “아이 키우다 보니 잠을 못 자서 자꾸 까먹네요, 하하.” 하지만 나는 원래부터 그랬다. 초등학교 때 책가방을 안 가지고 등교한 적도 있다.

은율이도 요즘은 “엄마는 맨날 ‘아 맞다!’라고 해.” 하며 나의 허당끼를 눈치채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가 참 놀랍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족한 부모를 아이는 신으로 여기게 만드신 것 말이다. 이것은 부모에게 초능력을 발휘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남편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은 퇴근했을 때 은율이가 달려 나와 반길 때이다. 지방에 있는 외가에서 며칠 머무르다 기차역에서 아빠를 만나면 전속력으로 달려가 안긴다. 나 역시 은율이가 나를 찾을 때 가장 행복하다. 모순적이지만 가장 힘들기도 하고 가장 기쁘기도 한순간이다.

아이를 키우며 나의 자존감이 많이 높아졌다. 나만 보면 웃어주는 딸. “엄마, 세상에 엄마보다 좋은 사람 없어. 엄마는 예뻐요. 엄마는 친구 같아.”라며 사랑해주는 딸 덕분이다.

사람은 나를 믿어주는 대상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를 세상의 전부로 여기고 믿는 딸. 그런 어린 딸에게 어찌 한계를 넘는 사랑을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초인적인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 날 은율이가 “엄청”과 “평생”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설명하려고 할 때 “~잖아. 그럼 이렇게 이렇게 되겠지?” 같은 말을 자주 쓰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나도 의식하지 못했던 내 말투를 따라 하는 것이었다. 딸이 나의 모든 것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춘기를 잘 넘기게 할 예방주사, 골든타임
아이는 부모의 단점도 빼닮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갓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를 전적으로 믿도록 만드셨다. 무서운 사실은 부모가 자신에게 나쁘게 한 행동마저 사랑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부모의 자리가 얼마나 귀하고 떨리는 자리인지 알 수 있다. 아이 키우는 일이 쉽지 않다고들 한다. 청소년기 자녀를 둔 부모님들 가운데는 우울증약을 드실 만큼 힘들어하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자녀를 키우는 일이 마냥 힘든 일만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디자인해 두신 것이 있다. 조금만 육아에 관심이 있다면 36개월이니 72개월이니 하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육아에서의 골든타임이다.

그것은 아이의 두뇌, 인격, 정서 그리고 사회발달 등이 이루어지는 최적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말랑한 클레이에 비유될 수 있다. 이 무렵의 아이들은 부모를 신으로 여긴다. 엄마인 나를 최고로 사랑하며 나의 모든 것을 흉내 낸다.

내 말이 진리인 줄 알고 따른다. 이 얼마나 절호의 기회인가. 나는 이 시간을 놓치는 엄마들을 보면 도시락이라도 싸다니며 말해주고 싶다. ‘지금 이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라고.

지금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며 엄마가 최고라고 할 때 아이에게 좋은 씨앗을 많이 뿌려두길 권한다. 아이를 당당한 어른으로 커가게 할 자존감을 심어줄 수 있는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책 읽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그것도 지금이 적기이다. 우리 부부에게서 닮지 않았으면 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타이밍도 지금이다.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쏟아야 한다. 아직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아서 나를 의지하며 조건 없이 웃어주는 이 시기, 그 연약함에 감사해야 한다.

다시 은율이를 낳는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차가운 병원과 조리원 신생아실에 아기를 두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놀라운 시간,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낯섦과 차가움을 느낄 은율이를 따뜻한 내 품에 안아줄 것이다. 태어난 그 날부터 얼마나 사랑하는지 날마다 귓가에 이야기해줄 것이다.

나를 의지하며 조건 없이 웃어줄 때, 그때가 골든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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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혜진
고려대 및 한동대 국제로스쿨 졸업, 뉴질랜드 FamilyMinistries 학교수료.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어린 시절이며 육아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믿음으로 자발적 경단녀로서 양적 질적 시간을 꽉꽉 채운 가정양육을 하며 느낀 경이롭고 행복한 과정을 글로 풀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인스타: miracley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