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에 장자(壯子)를 만나다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인류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코로나-19로 인해 팬데믹의 공황에 빠졌다. 눈에 보 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무기력함을 드러냈고, 희생자들을 애도할 시간도, 시신들을 처리할 방법도 찾지 못한 채 망연자실해 하였다.

마스크로 상징되는 개인과 개인의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단절’과 ‘무관심’ , 그리고 ‘고립’이라는 단어는 다시 한번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며 참된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하나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경험하고 관찰함으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였던 구약성서의 전도자와 중국 역사에 가장 혼란하고 가혹한 시대를 겪으며 하나의 철학 사상으로 자리매김을 한 장자의 인간 이해를 중심으로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코헬렛과 장자는 인간이 현실의 삶에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지만 욕망과 권력에 지배당하며 살고 있고, 또한 자유롭지 못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혹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구속에 갇혀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삶의 다양한 일들의 원인과 결과를 인간의 제한된 경험과 지식으로는 온전한 사물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인식론적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점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한계를 가진 유한한 존재로 인간을 이해한다.

이러한 한계로 고통스러워하며, 또한 이에서 벗어나 삶의 참된 가치를 깨달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였다.

히브리인들의 경전으로서 전도서와 동양 철학사상으로서의 장자는 동떨어진 시대와 문화 배경을 가진 서로 다른 성격의 문헌이지만 종교와 민족을 초월한 인류 보편의 공통된 관심사인 현실 세계의 공통된 인간 이해를 기초로 두 문화권의 초월자에 대한 인식과 인간관을 알아보고 현재의 삶에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는 열쇠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 동안 전도서와 장자 내편 7편으로 한정한 인간 이해를 비교하여 살펴보고, 이를 기초로 하여 전도서의 언어를 통해 장자의 개념들을 새롭게 해석해보고자 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중에, 혹은 아주 작은 일부라도 도가(道家)의 관점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서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이러한 실수를 바로 잡고 특별히 도가 사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전도서에 대한 더욱 풍부하고 창조적인 성서 이해를 통해 일반 계시로 주어진 인류 보편의 지혜와 특별 계시를 통한 더 깊은 인간 이해의 통찰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대해본다.

<전도서>와 <장자>에 대한 선(先)이해-신(神)인식과 자연(自然)관
전도서와 장자의 인간 이해를 비교하는 데는 선 이해가 필요하다. 그 차이점의 핵심에는 초월자에 대한 신 인식과 자연관이 있다. 전도서는 히브리인들의 종교 경전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온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신앙함을 전제한다.

그들에게 창조자를 전제로 하지 않은 세계란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우주 만물은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로 인식되었다.

히브리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은 신앙고백 이전에 사고의 전제 조건이자 세계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었다. 이는 삶의 모든 영역은 항상 창조자와의 관계 속에서 있으며 세계와 그 속의 사소한 삶까지도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서 온 그것으로 여기는 것이 그들의 삶의 바탕이었다.

당연히 고대 히브리인들에게는 동양 사상에서 말하는 의미인 자연(自然)의 개념이 없었다. 또한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은 하나님의 창조로 우주 만물이 시작하여 어느 순간에 종말로 끝이 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계는 끝없이 순환,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는 유한한 것이었다.

반면, 장자의 사상은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을 따지지 않고, 존재는 그냥 ‘스스로 있는 것’, ‘이미 있는 것’, 즉 자연(自然)이라는 전제에서 자연 질서의 영역, 특히 우주 질서를 관찰하는 데서 그의 사고는 출발한다.

고대 동양인들이 관찰한 것은 우주 천체들의 질서와 조화, 규칙적인 계절의 변화와 사물의 생성과 소멸이었다. 그러하기에 고대 시대 자연에 대한 개념은 단지 무한한 원을 그리며 끝없이 계속될 순환적이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자연의 순환적인 시간에는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고, 세계의 시작도 종말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반복되는 시간의 개념 속에서는 역사의 어떤 특정 사건과 시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추구한 것은 변하지 않는 영원함, 즉 초시간적인 진리에 대한 관조였다.

장자의 사상은 자연 자체가 자생력과 번식력, 그리고 창조력을 가지고 있어 거기에서 모든 존재의 탄생과 변화와 성숙이 일어난다고 생각함으로 종교적 세계관을 탈피해 버렸다. 그들이 생각한 자연은 영원한 것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장자 사상은 초월자와 초월의 영역을 부정한다. 그러함으로 장자에게 신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장자에게도 인간의 힘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사모와 동경은 있었지만, 그 초월적인 것은 그 앞에 무릎 꿇고 빎으로써 은혜를 구하는 인격적인 신은 아니다.

장자가 말하는 초월적인 것이란 인간을 만물과 동등하게 생성 변화시키고 사멸시키는 천지 우주의 자유스러운 작용, 즉 자연(自然)의 도(道)이다.
이와같은 신인식과 자연의 관찰을 통한 세계관의 차이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다른 결론을 도출한다.

절대적 창조주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한계를 인정하는 전도서와 다르게 장자는 인간이 그 인식적 한계를 초월하여 도(道)와 하나 된 절대적 자유의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장자(莊子)에 대하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장자의 기록은 기원전 1세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 傳)>에 등장하는 장자에 대한 소개다.

“장자는 몽(蒙)지방 사람이고 이름은 주(周)이다. 그는 일찍이 몽지방의 칠원(漆園)이란 곳에서 벼슬아치 노릇을 했으니, 양(梁) 혜왕(惠王), 제(齊) 선왕(宣王)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장자의 고향은 몽(蒙)으로 속한 나라에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견해는 장자를 송(宋)나라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장자>에서 송(宋)나라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장자 <열어구(列禦寇)> 편에는 송나라에 장자가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생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장자가 양의 혜왕(B.C.370-319), 제의 선왕(B.C. 319-301)과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사기(史記)의 기록과 그의 친구 혜시(惠施, B.C. 370-310)가 송나라 출신으로 양혜왕 밑에서 공직을 수행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어림잡아 본다면, 그의 생존연대를 대략 기원전 370년-300년으로 잡을 수 있다.

장자는 한때 칠원(漆園)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칠원리(漆園吏)는 옻나무밭을 관리하는 하급 관리로 직위가 낮고 보잘 것 없는 말단 관리였음을 짐작케 한다.

장자가 살았던 기원전 4세기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기이다. 이 시기는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의 농업 생산력과 이에 자극을 받아 상공업이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송나라는 약소국인 데다가 잦은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은 혼란하고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 가혹한 삶을 이어나가야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권력자들의 부국강병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이어갔고, 결과적으로 가장을 잃은 고아와 과부, 장애인의 수가 크게 늘었다. 또한, 점령국에 대한 강한 통제와 억압, 착취로 백성들은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혼란한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당대 지식인들은 세상을 안정적으로 다스릴 다양한 통치 이론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장자가 활동했던 전국시대 중기는 법가(法家)가 많은 제후에게 채택되어 주도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 추연(鄒衍) 등 새로운 학설과 사상이 서로 논쟁하며 발전한 이른바 백가쟁명(百 家 爭 鳴)의 시대였다.

그러나 춘추시대부터 전해 온 유가와 묵가가 여전히 정치, 사상, 사회 등 많은 영역에서 깊숙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장자는 부귀와 양명, 예의 등의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즐거움을 선택하는 삶을 살았다. 몇 가지 전해오는 설화를 통해 장자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부인이 죽었을 때 그 앞에서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자신이 죽으려 할 때 후하게 장사지내려는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이 나의 관이요, 해와 달은 한 쌍의 구슬 장식으로, 별들은 진주와 옥 장식으로 삼고, 천하 만물을 나의 장례용품으로 삼았다. 이에 빠진 것이 또 있겠느냐? 장례식을 위한 도구는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덧붙인단 말이냐?”<열어구 11>라며 자신의 시체를 산야에 버리라고 유언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장자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에 초연한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그는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장자가 위왕(魏王)을 찾아갔을 때의 차림새를 보면 누더기로 기운 옷과 삼끈으로 얽어 묶은 신발 차림이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남루한지 그가 장자를 보고서는 왜 이렇게 고달프게 사느냐 물을 정도였다.

또한, 감하후(監何候)라는 벼슬에 있는 부유한 이에게 쌀을 얻으러 갔다가 모욕을 당한 이야기 속에서도 그의 가난한 삶을 알 수 있다.

코헬렛(Qoheleth) 대하여
전도서 1:1의 표제가 명시하고 있는바,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이다. 전도서라는 제목은 전도서 1:1의 화자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인 코헬렛에서 왔다. 코

헬렛이라는 단어는 전도서에 7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다른 히브리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코헬렛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히 파악할 수 없지만, 어근을 근거로 의미를 추정해보면 인명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직업적 호칭이나 직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코헬렛은 집회를 소집하는 역할 혹은 지혜 관련 자료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연구자의 역할(전도서 7:27; 12:11)에서 비롯한 명칭일 것이다. 칠십인 역은 이 단어를 ‘회중을 모으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뜻으로 번역했고, 이후에 루터가 이것을 설교자(Prediger)라고 번역하여 이로부터 ‘설교자’, ‘전도자’라는 명칭이 시작되었다.

전도서의 저자인 코헬렛은 자신을 ‘다윗의 아들’과 ‘예루살렘의 왕’(전도서 1:1)으로 또한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전도서 1:12)으로, 장자와는 달리 자신을 스스로 솔로몬 왕, 혹은 그와 비견될 만큼의 지혜와 부와 명예를 갖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전도서 1:12).

그의 지혜는 비길만한 사람이 없었고(전도서 1:16), 그가 한 모든 수고는 성공하여 수많은 노예와 비교할 수 없는 양과 소 떼(전도서 2:7), 그리고 큰 부와 많은 처첩을 두었다(전도서 2:8)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코헬렛의 자전적 기사로 랍비 및 기독교 주석가들은 이 책에 솔로몬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전도서 1:1)는 전도서의 표제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잠언 1:1)는 잠언의 표제 양식에서, 잠언은 자신의 이름을 ‘솔로몬’으로, 전도서는 ‘전도자’라고 밝히고 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같은 표현이다.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비교적 솔로몬의 생애 후반기인 대략 BC 935년경에 전도서가 기록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의 삶은 전통적인 지혜가 약속한 형통한 삶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함에도 그가 완전한 지혜와 끝없는 부를 추구한 이유는 후대에 ‘기억’이라는 방법(전도서 1:11; 2:16)으로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 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자>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 에서 인용하여 쉽게 의역
*장자의 사상 논하는 부분은 유튜브 채널 취투부(www.youtube.com/zziraci) 운영하는 고전 연구자인 기픈옹달(zziraci.com)님의 자문 통하여 진행
*전도서의 역사 비평적 논의, 특히 편집 비평과 전승사적 비평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현 상태의 최종 본문이 의미를 갖는 공시적 접근 방법으로 구조적 관점에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