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사상의 ‘기독교적인 민중구원사상’의 모순

북미 주체사상 연구회에서는 민중신학의 중심 주제로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보며 민중을 두 가지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라오스(Laos)’요, 또 하나는 ‘오클로스(Ochlos)’이다.

전자는 국민같이 어떤 집단의 보호를 받고 있는 민중이며, 후자는 반대로 아무런 보호와 권리를 받고 있지 못하는 민중이다. 복음서에 예수를 따른 수많은 무리의 민중은 바로 이 ‘오클로스(Ochlos)’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오클로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며, 기성 사회에서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이며, 잃어버린 양이며, 백안시 당한 탕자며, 초대받지 않았던 동네 큰 거리와 골목에서 배회하는 가난한 사람들, 불구자들, 맹인들, 절름발이며, 해가 떠도 일자리 없이 거리를 헤매는 실업자들이며, 눌린 자, 포로 된 자들이며, 배고프며 헐벗었으며, 슬퍼 통곡하며 박해를 받은 자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북미 주체사상 연구회에서는 ‘기독교적인 민중구원사상’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고백대로 그의 ‘기독교적인 민중구원사상’에서 온 것이며 예수께서 구원사업의 제일의 대상으로 했던 세리, 문둥이, 소경, 절름발이, 과부, 고아, 창녀, 죄인, 귀신들린 자와 동일하다.

그는 이 버림받은 도시 천민과 감옥의 천민 속에 ‘복음이 인간회복의 메시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했다. 즉 ‘극적인 인간의 비참이 극단적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전환하는 ’구속적 역설’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천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저항하고 승리하게 함으로써 궁극적 해방을 제시한 것이다. 이 민중이 끝내 민주혁명의 주역이 되며 해방의 주인이 된다.”

또한 북미 주체사상 연구회에서는 “예수의 궁극적 선교는 이 민중의 사회정치적 해방에만 멎지 않았고, 더 나아가 해방된 민중이 마침내 역사의 주체가 되고 다시는 억압과 고통과 소비의 비인간화가 없고, 사랑, 정의, 평화, 친교, 기쁨이 통치하는 이른바 ‘메시아 왕국’의 영원한 주체로 실현되는 데 있었다”라고 말한다.

필자는 위에 기술된 내용들과 비교되는 성경적인 의견을 구원의 대상, 복음의 목적, 복음서에서의 대중의 의미, 예수의 궁극적 선교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예수께서 구원 사업의 제 일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물론 오클로스적인 민중들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는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중에 복음을 전하시면서 가난한 자, 부한 자, 병든 자, 건강한 자, 고통 당하는 자, 문제 있는 자 등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으시고 여러 높고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구원을 받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천한 마리아와 거지 나사로를 만나셨고, 또한 부자 세리 마태와 로마 백부장과 예수님 당시에 산헤드린 공회원인 높은 신분이었던 니고데모를 만나셔서 그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모두에게 구원의 길로 이끄셨다.

예수께서 구원 사업의 제 일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대상인 것을 알 수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4~16)

또한, 이 버림받은 도시 천민과 감옥의 천민 속에 ‘복음이 인간 회복의 메시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하는 내용에 있어서 복음이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은 적합한 말이다.

하지만 복음이 인간을 회복시킨다는 참 의미는, 인간들이 행하고 있는 죄와 불순종과 더러움과 세상의 잘못된 사상을 다 제하여 버리고 거룩하고 정결한 모습을 소유한 모습, 즉 최초 인간 아담이 죄를 범해서 잃어버렸던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배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세기 1:26)

사람의 고귀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일차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날마다 새롭게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대부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로새서 3:10)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베드로후서 1:4)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선교
이어서 필자는 다음의 내용들에 대해 문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궁극적 선교는 민중의 사회 정치적 해방인가? 복음서에는 천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저항하고 승리하게 함으로써 궁극적 해방을 제시하고, 이 민중이 민주혁명의 주역으로 해방의 주인이 되어 메시아 왕국의 영원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복음서(개역개정판 NIV 성경, 2007년)에는 사랑, 용서, 희생이라는 말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누가복음 6:28,29),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라”(마태복음 5:10),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태복음 5:13~15).

복음서에서 천한 사람들을 등장시킨 것은, 천한 사람들이 사회체제에 저항해서 해방의 주역으로 하기 위함이 아니며,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절망에서 소망을 갖고 인생에서 용기와 꿈을 가지므로 기쁨의 삶을 살도록 함인 것이다.

예수님은 특히 천하고 낮은 사람들을 위하시고 애쓰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어린 시절 자라나실 때에도 지역에서 제일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많이 살고 있던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나셨다. 이 이유는 예수님의 천한 자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은혜가 충만하심인 것이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 5:2),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태복음 25:45).

예수님의 궁극적 선교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이다. 투쟁과 저항의 방법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희생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마가복음 1:38)”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메시아의 십자가 의미는 역사적 고난에 참여하여 민중과 고난의 연대를 이룩한다는 것이기 보다는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라 할 수 있다.

‘독생자’의 어원은 ‘톤 모노게네’라는 말로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아들’ 또는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대상이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의 대상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보내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은 너무나도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메시아의 십자가는 메시아가 모든 악과 죽음의 틀에서 해방된 새로운 민중의 역사적 주체로의 회복으로서의 부활에로 인도한다는 의미보다는, 죄와 흑암에 덮여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메시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삶과 영원한 천국 소망을 갖게 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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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파라카이 예수사랑교회 다민족 선교 담임목사. 총신대신대원 졸업. 한의사로서 남태평양과 뉴질랜드 지역에 의료 선교 사역을 하고, 미국 그레이스신대원 문화교류학박사 논문인‘북한선교를 위한 접촉점으로서의 복음에 대한 연구’를 쉽게 풀어 25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