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예수님 닮기

유진 피터슨이 쓴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라는 책에서는 청소년들과 함께 그 부모님들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진통을 겪으면서 성숙되어갈 때 부모들도 다루기 힘든 그 자녀들이 도구가 되어 함께 성숙해 가기 때문이다.

선교사들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선교사라고 해서 인격이 완전하지 않다. 영혼 구원의 열정은 있지만 아직 다듬어져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으며 영적으로 계속 자라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지에 우리를 보내시면서 현지인들을 섬기고 동료선교사들과 협력해서 선한 일을 하라고 보내신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모두가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사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나서 사역보다 관계를 통해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선교 사역과 함께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되고 자라나기를 원하실 것이다.

사실 선교사역은 하나님이 다 하실 수 있지만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은 현지인들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품을 다듬으시고 성숙시키기 위함이다. 그래서 선교 현장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특별 훈련장이었다. 현지인들과 생활하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고민하며 예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나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
우리가 선교지에서 가장 크게 훈련을 받은 것은 인내였다. 우리가 마을에서 살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이 집을 지어 주기로 했다. 물론 우리가 건축 전문가들의 힘을 빌려서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지만, 성경번역이라는 일이 그들 현지인들의 일임을 인식시켜 주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이 직접 짓는 것으로 했다.

처음에 그들은 2주 만에 지을 수 있다고 장담을 했다. 그들이 직접 숲에 가서 나무를 베어오고 나무를 다듬어서 한다고 해도 2주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물론 그들이 만약 전적으로 그 일에만 매달린다면 그 정도의 시간이면 가능할 것 같았다. 보통 뉴질랜드에서 사는 집의 수준이 아니라 문을 달고 칸막이를 하고 지붕만 얹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2주는 아니라도 최소한 한 두 달 정도면 완공될 줄 알았다. 그래서 체인 톱 연료와 못을 사다 주었다. 어렵게 시작한 공사는 여러 번 중단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체인 톱의 연료가 없다고 한다. 전에 사다 준 연료가 충분할 것 같았는데 강을 오르내리는데 타고 다니는 보트에 사용했든지 다른 것에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필요한 대로 또다시 연료를 사다 주고 못을 사다 주었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을 하면서 2주 만에 완공된다고 하던 집이 2년이 넘게 걸리게 되었다. 2년 동안 우리는 마을의 빈집을 빌려서 살기도하고, 집에 나무 바닥을 깔았을 때는 그 위에 텐트를 치고 외벽을 천막으로 둘러놓고 거기서 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가 마을에 있으면 집의 공사가 조금씩이라도 진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선교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완공되지 않은 집에서 방 안에 칸막이 없이 지냈다.

때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따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조용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 주는 것도 그들에게는 큰 헌신이었다. 체인 톱 연료를 개인 용도로 사용해 버리고 시침이 떼는 것은 나빴지만, 그들도 자기 집의 일을 해야 하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서 도시에 내다 파는 등 틈틈이 시간을 내서 집을 지어 주는 것인데 그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참고 기다렸다.

그러면서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이며 본향에 가면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를 기다리시고 참아 주시는 예수님의 인내를 배우는 귀한 시간이었다.

주님의 신실하심
아주 덥고 습한 날씨, 교통편이 없어서 걸어서 다니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은 곳, 전화도 잘 연결이 안 되는 곳,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약속을 정확하게 지키기가 쉽지 않다. 약속을 너무 쉽게 하고 너무 쉽게 어기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나에게는 큰 어려움이었다.

각 요일을 정해 놓고 사람들이 모여서 성경번역 작업을 했다. 그런데 한 번도 정해진 시간에 오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오기만 해도 감사한 일이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직접 집으로 찾아간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밭에 가 버리고 사냥하러 가거나 물고기를 잡으러 가고 없을 때도 많았다.

그들이 신실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당장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약속을 잘하지만 나중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면 우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약속시간을 잡으면 1분도 늦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런데,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일이 매번 일어나게 되니 마음에 평강이 깨어질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와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다. 나도 역시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때가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그때마다 주님이 나에게 화를 내셨다면 과연 내가 견딜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서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주님의 겸손하심
파푸아뉴기니는 언어가 800개 넘는 부족국가이다 보니 나라의 경제발전이 쉽지 않다. 마을에서는 전기나 수도시설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강이 있으면 정말 풍요로운 마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이들과 같이 되어 살아가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나 또한 마을에서 그들과 같이 강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고 강에서 목욕하고 빨래와 설거지를 해야 했다. 뎅기열에 걸려서 한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 있기도 했고, 뎅기열이 다 나은 후에도 후유증 때문에 고생을 했었다. 이렇게 약간의 환경만 달라지면 몸과 마음이 힘들어지고 섬김을 받으려는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우리이다.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인간과 같이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모습을 생각해본다. 우리가 아무리 낮아진다고 해도 피조물이 피조물로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창조주가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이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조금 불편한 환경으로 옮겨간 것과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런 주님을 생각할 때 약간의 불편함과 번거로움도 좀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앤드류 머레이가 말한 ‘주님의 겸손함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자비하심
파푸아뉴기니에는 ‘카고 컬트(Cargo-Cult)’가 있다. ‘화물숭배’로 번역되는 하나의 미신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자기들에게 줄 것이라는 생각을 옛적부터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항상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물건들을 요구하거나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선교사들은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많다. 주는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주고 싶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므로 늘 고민이 많아진다.

다행히 우리 부족사람들은 요구하는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종종 그런 경우가 있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이들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가? 에 관한 의문이다. 나는 이들에게 말씀을 주러 왔는데 이 사람들은 내가 가진 물건들에 더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선교사에게 잘못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속에 그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가 있는 것이 먼저이고 기쁨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선교지에서의 팍팍한 삶은 나의 연약함이 쉽게 드러나는 장소이고, 나를 연단하시는 주님이 허락하신 광야의 학교였다. 선교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지로 간 사람들이다. 큰 것을 포기하는 것은 잘하는 것 같은데 삶의 현장에서 지극히 조그마한 것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이것은 자기 내면의 갈등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 주신 소중한 이웃과도 갈등의 요소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황에서 나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시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선교사가 되어 우리 주님을 더 많이 닮아가는 제자가 될 수 있을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