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자녀 이야기

선교사는 소명을 따라 선교지로 가지만 어린 자녀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를 따라 나서게 된다. 우리가 교회사역을 내려놓고 선교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에게 우리의 비전과 계획을 이야기하고 동의를 구했다.

그 당시 큰아이는 7학년이었고 작은 아이는 4학년이었다. 어렴풋이 선교에 대해 알고 있었던 아이들은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선교사가 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자신들에게 생기는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엄마, 아빠가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동의를 하고 만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동의하지 않았더라도 설득을 해서 데리고 갔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늦게 시작한 선교 사역만 생각했지 아이들에 대해서 깊이 배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밀려올 때가 많다.

이번 호에서는 선교사들의 가장 큰 고민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의 자녀교육에 대해서 좀 나누면서, 어떤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그저 우리의 경험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선교 준비 기간의 아이들
우리는 선교지로 들어가기 전에 훈련을 위해 이미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학교도 옮겨야 했는데 사춘기로 접어든 아이들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이 사춘기라는 사실과 아이들의 성향에 대해서 고려하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목회자 자녀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사역지를 따라 많이 옮겨 다녔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옮겨 다닐 때마다 잘 적응을 해나가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때는 여러 가지로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 시기에는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시기라 친구가 아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조금 친해질 만하면 떠나게 되니 정말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아내와 나는 어렸을 때 전학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에 대해서 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한국에서 선교 훈련을 하면서 포항에서 1년 반 정도의 시간을 보냈었다. 큰 아이가 한국에서의 중학교 생활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감사하게도 친구들을 사귀면서 점점 더 적응을 잘해 나갔다.

어느덧 훈련을 마치고 선교지로 나갈 시간이 되었다. 선교지로 떠나던 날 큰아이의 참아왔던 서러움이 터졌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늦은 밤까지 모여서 축구를 하고 새벽에 들어온 아이는 다들 짐을 꾸리느라 바쁜데 소파에 앉아서 울고 있었다. 안 가면 안 되냐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파왔다.

가장 예민한 사춘기 시절을 보내면서 친구들과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이제 모두와 헤어지고 떠난다는 것이 큰 아픔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스케줄에 맞춰져 있었고 아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리라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이들과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어려움에 대해서 좀 더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선교지에서의 아이들
파푸아뉴기니 성경번역선교센터에는 감사하게도 선교사 자녀학교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둘 다 중학교 이상의 나이였기 때문에 우리가 마을로 가면 아이들은 자녀를 돌보아주는 기숙사로 가서 생활을 하였다. 완전히 달라진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며 적응해 가면서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하였다.

둘째 아이는 학교의 밴드부와 함께 학급 일에도 많이 관여를 하면서 섬겼고, 큰아이도 역시 학교의 밴드부와 예배 팀에서 반주로 섬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한국을 떠나기 전 만큼 친구들과의 친밀함을 느낄 수가 없어 힘들어했다.

선교사 학교에 있는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왔기 때문에 대부분이 이미 관계가 형성이 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로 우리 아이들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조금 친해지면 안식년으로 떠나 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아이들이 안식년에서 돌아오기도 했다.

하루는 큰아이가 학생들 예배를 마치고 울면서 나에게 와서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좀 해달라고했다. 자기는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또한 작은 아이는 형이 먼저 뉴질랜드로 떠난 후에 혼자 남아서 방에서 잘 나오지를 않는 경향이 있었다. 혼자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이렇게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볼 때마다 부모로서 정말 안타까웠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뉴질랜드로 돌아와서는 하나님께서 여러 명의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붙여 주셨다. 한국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만큼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하셔서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고 있다.

선교지를 떠난 아이들
아이들이 뉴질랜드에서 생활을 어느 정도 했기 때문에 선교사 자녀학교에서 영어는 비교적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서 전공해야 할 과목을 준비하는 것에는 제한적이었다.

큰아이는 미술을 전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학교에 미술 교사가 없어서 혼자 노력을 해야만 했다. 혼자 그림 연습을 하면서 때로는 그림이 잘 되지 않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아쉽기도 했고, 그림을 그린 후에 그것을 체크해 주는 사람도 없어서 잘하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선교사 학교에 미술 교사가 오기로 했지만 계속해서 늦어진다는 소식만 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고등학교 졸업을 한 학년을 남겨둔 채 다시 뉴질랜드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한 학년을 낮춰서 들어가서 미술 공부를 하게 되었다. 형이 떠난 후에 홀로 있던 둘째도 일 년 후에는 형을 따라서 뉴질랜드로 갔다.

아이들을 떠나 보낸 후에 우리 부부는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부부가 둘이 앉아서 밥을 먹다가도 “다녀왔습니다.” 하며 아이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남의 집 아이들만 봐도 우리 아이들 생각이 났다. 이 과정은 아이들을 떠나 보내는 모든 부모가 다 겪는 과정일 것이다.

부모를 떠나 멀리 간 아이들이 잘 먹고 잘 자고 있는지, 혼자서 힘들어하지는 않은 지 하나 하나 마음이 쓰인다. 아이들이 뉴질랜드로 돌아와서 다시 적응하며 외로워하고 힘들어할 때, 그리고 진로를 놓고 고민을 할 때 당장 달려가고 싶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
선교사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자녀 교육은 누구에게나 힘든 과정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렇게 자녀 교육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 우리 아이들을 지켜 줄 수 있었던 것은 가정 예배였다. 성경번역훈련을 하는 중에는 밤잠까지도 줄여야 할 만큼 공부할 분량이 많았지만 매일 드리는 가정예배는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선교지에서도 아내와 내가 마을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아이들이 있는 본부에 가면 가정예배를 매일 드렸다. 그 시간은 함께 찬양하고 묵상한 말씀을 나누는 시간과 함께 하루 동안의 삶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거기서 울고 웃으며 깊은 가족애를 느끼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아이들은 외롭고 힘들었던 선교지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 같다. 후일에, 우리와 떨어져 있는 동안에 아이들에게 가장 그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가정예배를 드리던 때라고 대답을 하였다.

한국성경번역선교회에서 출국 전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 우리 단체의 시니어 선교사님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은 자녀들에 대해서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거나 연민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비록 부모를 따라 선교지로 가긴 했지만 하나님은 그 아이들에게 맞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부모로서 자녀들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역에 임하라고 하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역에만 집중하며 자녀들에 대해서 무관심하라는 말씀은 아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잘하면서 하나님께 아이들을 맡겨드릴 때 주님은 우리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실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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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 현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했고 2007년도에 뉴질랜드로 건너와서 한우리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겼다. 선교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한국의 고신(예장)교단(KPM) 및 성경번역 선교회(GBT) 소속 선교사로 파푸아 뉴기니에서 성경번역 사역을 하였다. 2020년 2월부터 해밀턴 주사랑교회에서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