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협주적 교향곡 K 364

Sinfonia Concertante는 번역하면 협주적 교향곡 또는 교향적 협주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협주곡과 교향곡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던 바로크 시대에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이란 형식이 있었습니다.

두 대 이상의 독주 악기 그룹이 관현악과 이야기를 나누듯 주고받으며 협주하는 형식이 합주협주곡인데 모차르트가 이를 발전시켜 Sinfonia Concertante의 형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오늘 들을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협주적 교향곡 K364가 이 형식 아래 작곡된 곡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걸작 중의 하나입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함께 독주 악기로 택한 것부터 모차르트의 독창성이 보이는 이 곡은 특히 고전 시대에 비올리스트가 협연할 수 있는 유일한 곡이었습니다.

이 곡의 2악장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엮어내는 우수에 찬 애절한 이중주는 절창입니다. 그렇기에 훗날 이 곡을 연주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가 2악장을 가리켜 ‘가슴에 사무치는 악장’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 따뜻한 부정(父情)
훌륭한 곡인 만큼 좋은 연주가 많지만 오늘 우리는 아름답고 훈훈한 연주로 듣습니다.
독주 악기를 맡은 David Oistrakh와 Igor Oistrakh는 부자지간입니다. David는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최고의 연주자일 뿐 아니라 지휘자이며 교수였던 그는 또한 따뜻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들 Igor도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곡을 연주할 때 그는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넘겨주고 자기는 비올라를 잡았습니다.

이들 부자가 연주하는 이 곡을 듣노라면 아들의 뒤에서 보살펴 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아버지보다 훌쩍 커버렸어도 아버지 눈에 비치는 아들은 항시 어린이일 따름입니다.
Kiril Kondrashin이 지휘하는 Moscow Philharmonic의 협연도 이들 부자의 연주와 조화롭게 어울립니다. 이들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문정희 시인의 ‘아들에게’라는 시(詩)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Oistrakh 부자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또 다른 음악가 부자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유명한 지휘자인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와 카를로스 클라이버입니다.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 1890-1956)와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1930-2004)
베를린 악단의 음악장을 지낸 독일 음악계의 거장인 에리히 클라이버는 히틀러의 나치에 반대해 아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5살 되든 해 아르헨티나로 망명했습니다. 아들의 이름도 독일 이름 칼을 스페인 이름 카를로스로 바꿔주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음악 공부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힘든 예술가의 삶을 아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카를로스는 아버지 몰래 음악 공부를 했고 뒤셀도르프와 취리히 등지에서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쌓아 가다 1974년에는 세계적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클라이버 부자는 명성과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든지 그들이 연주하고 싶은 곡을 연주하며 녹음보다는 라이브를 고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가 ‘나는 아스파라거스가 먹고 싶으면 신선한 것을 찾고, 없으면 할 수 없이 통조림을 먹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 같이 아들도 ‘레코드는 통조림 음악’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모두 녹음을 좋아하지 않아 그들의 활약에 비해 많은 레코드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 중에도 이들 부자가 남긴 베토벤의 5번 ‘운명 교향곡’은 둘 다 뛰어난 연주여서 오늘날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Beethoven Symphony No. 5 in C minor, op. 67 ‘Fate’ 운명 교향곡
교향곡의 대명사라고 할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은 모든 교향곡 중 최고의 걸작이며 모두에게 사랑받고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입니다. ‘빠빠빠 빰’하고 네 음으로 시작되는 1악장의 동기를 베토벤이 ‘운명은 이처럼 문을 두드린다!’고 했다고 그의 비서 안톤 쉰들러가 기록했기에 ‘운명’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이렇게 운명의 문을 연 이 곡은 청력 상실이라는 역경을 오히려 창작을 통해 이겨내는 베토벤의 위대한 삶을 투영하며 마지막 4악장에서 승리의 찬가로 마무리됩니다.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인 슈만이 이 곡을 ‘아무리 들어도 마치 자연의 현상처럼 외경과 경탄이 새로워진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평가입니다. ‘암흑에서 광명으로’라는 베토벤의 평생 신조가 가장 극명하게 감동적으로 드러난 이 운명교향곡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지휘자들이 이 곡에 도전했고 훌륭한 연주도 많지만 클라이버(Kleiber) 부자가 남긴 연주는 그 중에서도 출중합니다.

부자가 모두 완벽주의자여서 다른 지휘자보다 몇 배의 연습과 리허설을 고집했기에 단원들과 마찰이 심한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연 당일에 연주를 취소하고 사라져버리는 괴벽도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지만 두 발이 땅을 딛고 있다는 현실을 무시했기에 비난과 칭송이 언제나 함께 따랐습니다.

부자가 모두 베토벤 5번 교향곡의 최고의 연주를 남겼고 다행히 그 녹음은 레코드로 남아있습니다. 두 사람의 지휘가 모두 명료한 리듬감과 강렬한 색채감, 그리고 질주하는 속도감이 있기에 특히 이 5번 운명 교향곡과 맞아떨어졌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연주의 우열을 논하기 어렵지만 화요음악회에서는 아들 클라이버의 연주로 들었습니다. 1974년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연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지휘자가 되기도 쉽지 않지만 둘이 다 명장이 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끌어주고 받쳐주고 따라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는 아버지
음악 감상 뒤 같이 본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6~8절입니다.

  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2.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3.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4. 오늘의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 이유의 하나가 아버지의 부재(不在)라고 합니다. 아들을 참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는, 육의 아버지든 영의 아버지든 징계를 아끼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아버지들은 징계를 아끼지 않았기에 훌륭한 아들을 키워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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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