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에 적었던 ‘사랑’이라는 글자

지난 달 이야기에서 이어가고 싶다(이 글을 읽기 전에 지난 404호(christianlife.nz/archives/16870)를 꼭 읽어 주세요). 현재 청소년부 담당자 3년 차에 들어가면서 하나님과 사역,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며 깨닫고 있다. 그중에서 크게 배웠던 것 중 하나는 지난 1월에 있었던 “무브먼트 28 수련회”를 섬길 때였다.

부흥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보다 훨씬 더 헌신적인 분이시며,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은 우리보다 월등히 크시다는 것과 우리의 어떠한 도움 없이도 다 이루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땅끝 어디에 있을지라도, 또는 모슬림일지라도 꿈을 통해서라도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구원시키고 계신 것처럼 하나님은 내가 이끌지 않았어도 M28의 사람들을 만나 주시고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단지 주님이 내게 바라시는 건 오직 순종이었다. 내가 순종 할 때, 그분께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 북한에서의 나의 여정도 그러했다.

북한에 들어갔을 때 꽤나 흥미롭고 놀라운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많은 것들이 무색이었고, 상업적 선전 글자나 광고는 거의 드물었다. 중국 베이징을 지나서 들어왔기에 두 나라의 대조되는 모습이 크게 눈에 뛰었다.

둘째, 북한은 외국의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매우 궁금해 했고, 그들도 외국의 다른 나라들에 대하여 매우 궁금해 했다. 당시 나의 아이팟으로 촬영한 비디오와 사진들은 투어 가이드들이 끊임없이 확인하였다.

그리고 아이팟에 저장되었던 만화 하나가 있었는데, 50대가 넘은 운전기사 아저씨는 기회가 될 때마다 그 만화를 보여 달라고 했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같은 만화를 시청했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만화조차도 신기해했다.

셋째, 모두가 이렇게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술을 마시면 지옥에 간다고 믿었다. 우리 투어 가이드가 이 점을 꽤나 흥미롭게 생각했는지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술을 권했다.
아침 식사를 제외하고는 매 끼니마다 맥주가 나왔다. 어디에 가든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가이드 안내자들은 우리에게 술을 권했고, 우리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자 웃으셨는데, 우리 그룹의 다른 관광객들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넷째, 실제로 북한에는 6.25전쟁에 대한 거짓된 이야기를 그들은 믿고 있었다. 마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하에서 억압했던 것처럼, 남한도 미국으로부터 억압당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다섯째, 안내된 ‘관광’이 단순한 구경과 한정된 사진만을 찍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보여 준 것들과 방문했던 곳들이 모두 다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가게, 병원, 박물관, 역사적인 장소, 비무장지대 등 모든 장소들은 오로지 북한을 멋있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평양에 여성전문 병원이 있었는데, 여성들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는 모습은 놀라웠다. 쌍둥이나 세 쌍둥이를 출산한 여성들에게는 무료 건강검진이 제공되는 건 물론이고, 국가적 상이 주어졌고, 아이들은 장학금을 받는 특혜가 있었다.

북한 지도자들이 이렇게 보이려고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북한 사람들을 선하고 자유롭게 인도하는 것이 선전만이 아닌 진심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보았다.

여섯째, 북한에는 정부에 의해 운영되고 감시되는 교회들이 있었다. 대화 중 관광 가이드 박씨가 이 내용을 알려 주었을 때 나는 교회에 한번 가보라고 권유했더니, 가이드 박씨는 조용히 웃으며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이 대화를 나누며, 나의 형님이 되어버린 박씨에게 기독교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쓴 글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팀은 북한 사역 선교사들로부터 종교와 관련된 대화가 불법이기에 시작하거나 접근하지 말라고 오리엔테이션을 받았지만, 나는 이미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박씨에게 “우리 기독교인들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어보았다. 나의 질문에 형의 얼굴에 선한 웃음은 온데간데 사라지며, 내 눈을 바라본 후 인상을 찌푸린 채, “난 네 기독교인들을 아주 싫어한다”라고 대답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혹독한 비난보다는 그의 갑작스러운 목소리 톤과 감정변화는 나를 오히려 충격에 빠뜨렸다.

이어 박씨는 사람이 삶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해결방안은 찾지 않고, 기독교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단순히 무릎을 꿇고 기도만 한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설명했다.

좀 흥분된 어조 끝엔 그는 자리를 옮겨 앉았다. 너무 감사하게도 그의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고, 우리는 다시 형과 동생 사이의 관계는 유지되었지만, 그날 나는 모든 것이 끝장 나는 줄 알았다.

셋째 날에 우리는 평양 국립 도서관을 방문하였다. 이 건물은 북한의 지도자들이 큰 행사 때 주로 서서 손을 흔드는 큰 건물인데 김일성 광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는 그 건물의 음악실이란 장소로 안내되었다. 거기엔 많은 종류의 음악들이 카세트 테이프로 진열되어 있었다. 그 음악실의 담당 가이드가 오래된 영어팝송을 틀자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씨는 나를 가리키며 함께 춤을 추자고 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힙합 댄스에 푹 빠져 있던 때가 있었고, 춤을 췄던 기억을 그에게 말했었기 때문에 박씨는 힙합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내가 춤을 잘 춘다고 생각하며 권유했던 것 같다.

내가 고민하던 찰나에 통역사 이씨는 가운데로 들어와 한국의 아리랑 스타일의 춤을 추었다. 이씨가 춤추는 것을 보며, 나는 나의 숨겨왔던 춤 실력을 보여도 되겠다는 여유로운 마음이 생겼다.

문워크를 걸으며, 팝, 록, 비보잉, 크럼핑 모든 춤 동작을 선보였다. 이 춤들은 사실 아프리카 미국 힙합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아리랑 춤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다른 관광객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 특히 북한 사람들은 나의 강렬한 퍼포먼스에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통역사 이씨는 너무 신나하며 무슨 종류의 춤이냐고 질문하였다. 나는 힙합은 음악에 맞춰 춤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며, 힙합은 규칙이 없는 종류의 춤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다가와 내 귀에 조용히 말하길, “전에 본 적이 없는 처음 보는 춤인데 춤을 추는 네가 정말 자유로워 보이고, 여기 있는 우리의 춤은 모두 지루하고, 다 똑같아요”라고 비밀을 말하듯이 말을 할 때 나는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다섯 명의 여행 가이드들과 우리와의 관계가 특별히 가까워 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관광버스로 다른 도시로 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군사 박물관에 갔다. 그곳에서 군 고위 장교가 한국전쟁, 세계대전, 그리고 미국과 한국과 관련하여 강의를 하는 도중 항상 미국인(Americans)을 “미국 놈들”이라고 불렀고, 통역사 이씨는 “미국 놈들 (American Bastards)” 라고 통역하였다. 처음에는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것이 우리 팀의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모욕적으로 느껴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강의의 내용은 미국과 남한의 배신을 담았고, 북한이 공격 당했던 모든 자료들과 북한이 어떻게 반칙행위의 희생자이고, 남한이 그들의 약속과 평화를 깨뜨렸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수면 아래 가려진 감춰 놓은 진실, 그들이 미국과 남한의 피해자라는 이기심은 내 안에 무언가를 터트렸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한 이 감정의 끈은 진정한 분노였다.

그것은 바로 그 일 년 전, 2010년 11월 22일에 나는 한국을 방문했었고, 도착한 그 다음 날에 연평도 포격이 일어나며 온 가족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를 기억한다. 매일 뉴스로 사건을 목격하며, 그 당시 사람들의 혼란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을 생생하게 나는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군인의 강의가 끝난 후, 그는 우리 중 누구라도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옆을 보니 팀 전체가 공포에 질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논리적으로 그들과 진실을 논쟁하고 싶었으며, 그들을 고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나는 진실을 알리고 싶었었다. 나중에 우리 팀원들은 그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던 나의 얼굴 표정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던 가운데, 나의 마음 가운데 감동으로 한 단어가 떠 올랐다. 하와이 선교센터에서 북한을 위해 기도할 때 수첩에 적었던 ‘사랑’이라는 글자가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웃으며 그 굵은 체로 적었던 “ LOVE“ 는 우리 팀원들이 기도할 때 받았던 말씀이었다. 침묵 속에서 마치 성령님이 정신 차리라며 뺨을 때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일어난 상태에서 모두가 내게 집중하고 있는 그때에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국과 한국이 당신에게 보여준 불신과 적개심 때문에 당신들이 많은 고통과 슬픔에 빠진 것 같네요. 나는 어떤 질문을 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당신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토론하기 위해 여기 온 것도 아닙니다. 사실 여부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러나 그 고통의 감정을 헤아리며 그것을 이해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우리 팀에게 일어나라고 했다.

“우리는 미국과 한국을 대표하여 여러분들에게 사과하고 싶습니다”라고 담대히 전했다. 우리 팀 모두는 고개를 숙이며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북한 군인과 통역사는 우리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기에 충격을 받은 듯,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했다, 그리고 잠시 매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고맙다는 말도, 심지어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닥만 쳐다보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어색한 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부터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했었다.

다음날 우리는 여행 가이드들로부터 급격한 변화를 느꼈다. 그들의 얼굴, 목소리 톤, 몸짓, 분위기, 그리고 우리 팀을 향한 관심도 달라졌다. 통역사 이씨는 통역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쉬는 시간에도 우리 팀의 자매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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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양
2010년 호주 YWAM(Youth With A Mission)에서 훈련 받고, YWAM 하와이 코나에서 2017년까지 예수 제자훈련학교의 간사와 학교 책임자로 섬겼다. 2018년 후반 뉴질랜드에 돌아와 빅토리처치의 청소년부 담당자로 있고, M28의 책임 간사로 세상 끝까지 전하는 세대가 일어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