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 몽골에서

아가서 2장 10-14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이 아가서 말씀을 통하여 이 아름다운 땅을 떠나 하나님께서 “함께 가자” 하심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땅으로 떠나게 되었다.

선교사로의 부르심
아가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선교지에서 날마다 함께하셨다. 신학교를 다닐 때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선교사로 부르셨지만 여러 가지 변명으로 거절하면서 뉴질랜드까지 오게 되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선교사로 다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변명할 수 없도록 하셨다.

이곳에 와서 이민 목회를 시작하면서 “나이가 55세가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선교지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고백을 하였다. 목회를 시작하여 일 년에 한 번씩 선교지를 방문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게 하셨고, 때가 되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선교지를 향하여 출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아름다운 땅에서 나이가 들어 낯선 선교지로 떠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떠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셨고 길을 열어 주셨다.

선교사의 부름은 나 혼자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나의 아내도 하나님께서 선교사로서 떠날 수 있도록 역사하셨다. 하나님께서 내 아내에게 몽고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고 그곳으로 떠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주셔서 아내와 함께 기쁘게 선교지로 떠나게 되었다.

물론 아내는 여러 가지 걱정을 많이 했다. 특히 자녀들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자녀를 두고 선교지로 떠난다는 것은 부모로서 쉬운 일이 아니다. 선교사로 떠나면서 자녀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 주지 못하고 그냥 방치한 상태로 선교지로 떠난 것이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한동안 자녀들 때문에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녀들과 함께하시면서 키워 주시고 지켜 주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그들도 어려움의 삶을 살았겠지만 한 번도 어려움을 말한 적이 없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한국에서 선교 훈련을 받고 몽고인을 대상으로 사역하기 위하여 몽골을 선교지로 택하여 몽골에서 평생 사역을 할 것을 다짐하면서 모든 것을 준비했다. 물론 몽골을 떠날 때는 한국에서 가지고 간 짐들의 80%는 그곳에 있는 자들에게 다 주고 떠나왔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하신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몽골을 향해 떠나다
몽골을 향하여 몽골 항공기를 타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상공에서 바라본 몽골은 정말 가슴이 먹먹했다. 그곳의 환경은 뉴질랜드의 환경과는 정반대였고, 그날따라 항공기 창문을 통하여 본 것은 멀리서 구름 기둥이 아니라 황토 기둥들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기상 상태라면 대한항공은 회향하여 인천공항으로 돌아가겠지만 몽골항공은 그것을 개의치 않고 내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 광경과 착륙의 순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시작된 선교사의 삶
2008년 5월, 눈 내리는 몽골을 답사를 하고 7월부터 9월 말까지 몽골에 거주하면서 현지 선교 훈련을 받으면서 먼저는 거할 집을 얻고 몽골에 거주할 비자를 받아야 했으며 선교사는 그 나라의 언어를 2년간 배워야 하기 때문에 학원에 등록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선교지의 삶은 처음에는 정말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모든 환경이 아름다운 땅 뉴질랜드와 완전 반대되는 낯선 땅, 즉 한국의 60년대 같은 환경이지만 하나님께서 사역지로 주신 곳이기 때문에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땅은 그리 옛날 한국과 같이 척박한 땅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대화된 낯선 땅에서 선교사역을 한다는 것도 어려움이 있는데 과거 척박한 땅 한국에 온 미국의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그들은 정말 대단한 자들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온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를 다니면서 그곳의 청년들을 알게 되었고, 몽골어를 하나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여 청년을 소개를 받아 우리 집에 머물면서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자매와 고작 3개월 정도밖에 함께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있으며 그 자매는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지금은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또 한 청년은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몽골에서 개척교회를 하기를 원하고 있어서 지금까지 교제하고 있다. 그곳에서 얼마 있지 아니했지만 추억들이 많이 있다.

또 어느 선교사님과 함께 울란바토르에서 4시간 걸리는 작은 농촌에 가는 산언덕에서(2200M) 한국에서 준비해온 컵라면을 먹던 기억이 새롭게 생각이 나고, 내 아내를 보고 몽고인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그곳에 있으면서 먼저 온 선교사들의 삶을 보면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조금 정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시골 사역을 생각했기에 어느 날 다르향이라는 도시를 알기 위해 그곳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역을 하기를 원했지만 나의 집에서 통역하는 청년은 농촌에 갈 수 없다고 하여 포기하게 되었다. 이곳을 다녀온 후 먼저 온 한 선교사와 대화를 하면서 그곳보다 몽고인이 더 많은 다른 나라에 갈 것을 제안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른 나라로 보내시기 위함을 알고 그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 선교사의 말은 이곳에는 선교사들이 많이 있고 그곳은 선교사들이 거의 없으며 자기는 자녀가 있어서 쉽게 옮기지 못하지만 우리들은 자녀가 없어 자유롭게 옮길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다른 나라를 추천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3개월간 몽골에서 지내고 이제는 이곳보다 몽고인이 더 많은 나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지나간 3개월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로 바로 가면 내 아내는 거절하여 선교지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3개월간 몽골에서 훈련을 받게 하셨다. 물론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지만 크게 거부감이 없이 다른 나라에서 선교사역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몽골에서의 3개월은 우리에게 다른 나라에서 사역할 수 있는 훈련의 시간이며 원동력이 되었고 참으로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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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활성
총신대학과 동 신학대원을 졸업하고, 1990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이민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O국에서 현지인과 더불어 살면서 그리스도인의 일상을 담은 선교 이야기를 한 달에 한 번씩 한인 그리스도인과 나눌 때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선교의 사명을 되새겨 각자의 부르신 현장에서 선교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