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밤

Auckland Music Theatre 극단과 연결되다
뮤지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뉴질랜드 뮤지컬 산업과 처음 연결된 것은 2018년이었다. 영어 공부를 위해 만난 키위 튜터 David와의 수업 중 ‘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뮤지컬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David는 뉴질랜드 극단들에 직접 이메일을 보내보자고 제안했고, 그는 영어 교정을 맡아주었다.

지금이야 ChatGPT를 활용하면 영문 이메일도 쉽게 다듬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영어 문장 하나 쓰는 것조차 큰 부담이었다. 영어로 대화가 안 되는 나를 과연 극단에서 받아줄까 하는 의심도 있었지만, David의 격려 속에서 검색을 통해 찾은 여러 극단에 2018년 3월,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고, 7월에 다시 한번 연락했을 때는 그저 형식적인 답변뿐이었다. 그렇게 6개월이 흐른 뒤, 2019년 3월에 다시 이메일들을 보내며 이미 자원봉사자 모집이 종료된 극단에도 연락을 넣어보았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답장이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1월, 오클랜드 시내 CIVIC 극장에서 열린 Auckland Music Theatre(AMT) 극단의 100주년 기념 공연 “레미제라블” 뮤지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레미제라블” 뮤지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할 때의 필자

나의 역할은 FOH 팀으로 관객에게 앨범과 기념품, 그리고 AMT 100년 역사를 담은 책을 판매하는 것이었는데 구매자에게 “Enjoy the show” 한마디조차 말하는 것이 떨려 더듬을 정도였다. 공연 중 대기 시간이 많아 옆에 있는 Julie라는 키위 할머니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는데 사실 나는 영어가 서툴러 그녀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이며 손짓으로 소통했다. 나중에야 그녀가 AMT 극단의 Trustee(신탁관리인)이자 100주년 책의 저자이며, 뉴질랜드 뮤지컬계의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Julie가 갑자기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해 왔다. AMT 뮤지컬 극단에서 Treasurer로 회계를 담당할 자원봉사자를 찾고 있는데 내가 회계사로 일하는 것을 기억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뮤지컬계에 어떤 식으로든 들어가고 싶었던 나는 망설임 없이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2021년부터 현재까지 Auckland Music Theatre에서 Committee의 일원이자 Treasurer로 5년째 활동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Treasurer로서 극단의 재정을 관리하며,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뮤지컬 산업과 극단 내부 운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내가 단순히 연출에 국한되지 않고, 공연을 준비하고 올리기 위한 다양한 프로덕션 업무까지 배울 기회가 되었다.

이 모든 시작점이 된 2018년은 고백하건대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시작한 해였다. 가장 나은 선택이라고 믿었던 결정 때문에 오랜 시간 함께했던 공동체를 떠났고,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영주권 문제와 삶의 여러 걱정 속에서 소망을 잃어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나를 붙들어줄 손도,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손도 없는 그 시간 속에서 그나마 영어 공부라도 해보겠다며 튜터 David를 만난 것이었다.

뮤지컬 관련 이메일을 보내고 4개월을 기다렸고, 반년, 다시 반년을 기다리며 설렘과 실망을 반복한 시간은 나를 점점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좌절했던 그 시간과 감정들은 지금 돌이켜보면 내 영혼에 어두운 밤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밤은 오히려 나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이 뮤지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게 하는 시간이었음을 글을 쓰며 다시 확인한다.

애굽 땅에 죽음이 임했던 그 어두운 유월절의 밤은 동시에 어린양의 피로 생명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밤이었다. 그러기에 말씀을 의지하며, 내가 지나고 있는 오늘의 이 어두운 밤들 또한 예수님의 피로 견디고,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만을 노래하며 살아내길 소망한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출 12:42)

내 어린양을 먹이라
2024년 새해가 밝고 2주가 지난 어느 날, 내 마음속에 한 찬양이 갑자기 떠오르며 뮤지컬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두 달 전, 유튜브에서 우연히 ‘이 아이들을 만나주세요’라는 찬양을 발견했는데, ‘요게벳의 노래’로 익숙한 염평안 대표가 만든 곡이었다.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길 원하냐는 주님의 질문에 엄마가 아이를 주님께 맡기며 아이가 하나님 나라, 교회 그리고 복음을 위해 살기를 간구하는 고백이 담긴 찬양이었다.

왜 그 찬양을 유튜브에서 클릭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날은 유독 공허한 마음 가운데 1시간 길이의 찬양을 틀어놓고, 2시간이 넘게 멍하게 앉아서 들었다. 어쩌면 그 어머니의 고백이 어릴 적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며 내 이마에 손을 올려 기도하시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거나 지난 세월 주일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내 마음속에 쌓인 여러 아쉬움을 생각나게 했는지 모르겠다.


2개월이 지나, ‘이 아이들을 만나주세요’ 찬양이 다시 생각나자마자 ‘내리사랑’이라는 주제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사랑, 주일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주는 사랑, 그리고 자녀이자 학생들이 성장하여 다시 다음 세대에게 건네주는 사랑들이 내 마음속에 부어졌고, 그 사랑들은 각각의 장면들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뮤지컬 대본을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처음에는 마음속 장면들이 희미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염평안 대표가 만든 모든 노래들을 유튜브에서 들어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내 마음속 장면들과 딱 맞아떨어지는 찬양 5곡을 발견했다. 노래들을 반복해 들을수록 모든 뮤지컬 장면이 분명해지며, 그 안의 캐릭터들이 서로 대화하는 내용까지 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리사랑’과 함께 교회를 위로하는 이 뮤지컬의 또 다른 메시지는 내 안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나를 모든 현실의 제약을 무시하고 움직이게 했다. 그 순간에는 내가 과연 대본을 쓸 수 있을지, 춤 안무가를 찾고 남은 장면들의 노래 작곡을 할 수 있을지, 배우 모집 및 연출, 공연 장소 대여, 음향과 악기 밴드를 구해야 하는 등 모든 것이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고, 어느 순간 염평안 대표의 연락처를 찾아 노래 사용의 허락을 구하는 이메일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후에는, 주변에 수소문하며 춤 안무가와 작곡가들에게도 장문의 카톡 메시지를 보내 이 뮤지컬에 함께해 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지금 돌아보면, 뮤지컬 창작 경험도 능력도 없던 내가 완성된 대본과 구체적인 계획 없이 6개월 뒤의 공연을 말하며, 모르는 사람들에게 함께하자고 설득한 일은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2018년도에 이메일을 반복하여 보내며 극단들의 문을 두드렸던 경험과 ‘Enjoy the show’라는 말조차 더듬거리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뮤지컬의 세계에 다가갔던 그 어설픔과 무모함이 뮤지컬을 창작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뉴질랜드 한인 기독교 사회 안에서의 문화 사역의 현실은 척박하다고 말해도 과하지 않은데 만약 모든 것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면 그 현실의 장벽 앞에서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인생의 어두운 밤이라 표현했던 8년 전, 이곳 뉴질랜드에서 살아남고자 바둥거리며 무엇이든 붙잡아보려 했던 나의 무모함과 연약함조차 하나님께서는 쓸모없다 하지 않으시고 오늘날 사용하심을 본다. 눈앞의 현실을 뛰어넘어 나로 꿈을 꾸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곳에 초대하시는 그분의 신비로운 지혜와 능력에 감사함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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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준영
2019년오클랜드 사랑의교회 집사. LoveU대표. 대학에서 회계를 전공하며 뮤지컬과는 연관 없는 삶을 살던 나를, 하나님께서는 지난 2년 동안 세 편의 창작 뮤지컬을 만들고 공연하게 하셨다. 크리스천 라이프에 매달 연재를 하며, 내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