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와 실내악곡

주옥 같은 가곡을 많이 작곡했기에 가곡 왕이라고 불리는 슈베르트는 가곡뿐만 아니라 음악의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얼마 전 한국의 가황(歌皇)이라 불리는 유명한 대중가요 가수가 작곡의 어려움을 말하며 신곡 하나 내려면 거의 1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가요 한 곡이 탄생하려 해도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을 생각할 때 1,000곡이 넘는 작품을 31년의 짧은 생애에 완성한 슈베르트는 진정 범용한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천재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곡 왕이라는 그가 작곡한 실내악만으로도 그는 불세출의 음악가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그 유명한 ‘죽음과 소녀’를 비롯하여 그가 작곡한 현악사중주만 도 15곡이 넘습니다. 또 모두에게 사랑받는 피아노 오중주 ‘송어’를 비롯한 많은 피아노곡들, 그가 작곡한 단 하나의 작품으로 악기의 이름이 아직도 전해지는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그리고 단 한 곡밖에 안 썼지만 불멸의 명작이 된 현악오중주 등등은 모두가 이 단명의 천재의 엄청난 재능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실내악 작품입니다.

화요음악회에서는 두 주일에 걸쳐 그의 실내악 중 네 곡을 선택하여 두 곡씩 감상할 예정입니다. 이번 주에 들을 곡은 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와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입니다.

아르페지오네 소나타(Sonata for Arpeggione and Piano)
‘기타 첼로’라고도 불리는 아르페지오네는 1823년에 오스트리아 빈의 시타우퍼(G. Staufer)가 발명한 악기입니다. 기타와 같은 몸통에 6가닥의 현이 있는데 그것을 첼로 모양으로 활로 켜서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별로 쓰이지 않았기에 발명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악기 이름조차 모를 정도로 잊혀졌습니다.

슈베르트는 기타와 첼로를 합친 듯한 이 새로운 악기의 특이한 음색에 반해서 이 악기를 위한 곡을 썼는데 이 곡은 지금까지 이 악기를 위해 쓰여진 유일한 곡입니다.

슈베르트 특유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이 곡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기에 슈베르트처럼 단명했던 악기 아르페지오네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아르페지오네 대신 주로 첼로로 연주되는 이 곡은 모든 첼리스트에게 가장 매력적이며 중요한 레퍼토리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곡을 작곡할 때의 슈베르트의 상황은 너무도 힘들 때였습니다.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원인을 밝혀낼 수 없는 허약한 건강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불과 27세(1824년)의 한창때의 그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때의 일기에 “나는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오직 어제의 슬픈 생각만이 다시 나를 찾아옵니다.”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런 고통과 슬픔, 그리고 절망과 불안을 극복하며 작곡한 곡이기에 이 곡을 듣노라면 밑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애처롭고 비통한 슬픔이 가슴으로 스며듭니다.

모두 3악장으로 되어있습니다. 20분 남짓한 연주 시간 내내 슈베르트는 슬픔을 노래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노래를 잊지 않는 가곡 왕 슈베르트가 피아노와 첼로로 빚어내는 선율은 슬픔이라는 노래입니다. “슬픔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다. 슬픔은 정신을 강하게 한다.”는 슈베르트 자신의 말이 다시 생각나게 만드는 곡입니다.

좋은 연주가 많지만 무엇보다도 우선순위 1위는 Mstislav Rostropovich의 첼로와 Benjamin Britten의 피아노에 의한 연주입니다. 풍부한 스케일과 음량이 돋보이는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연주의 대명사 같은 뛰어난 연주입니다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슈베르트는 모두 15곡의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에서 이 현악 4중주 제14번 “죽음과 소녀”가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 곡에 “죽음과 소녀”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는 제2악장이 슈베르트 자신이 쓴 “죽음과 소녀”라는 가곡의 반주 부분을 도입해 그 음울한 멜로디를 바탕으로 한 변주곡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곡 “죽음과 소녀”는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 (M. Claudius)라는 시인의 시에 붙여진 곡인데 죽음에 다다른 소녀와 그녀의 생명을 거두어 가려는 사신(死神)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녀의 간절한 소망, “나는 아직 어려요. 그냥 지나가 주세요.”
사신의 달콤한 대답, “나는 친구란다.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야. 내 팔 안에서 꿈결같이 편히 잠들 수 있단다.”

1826년 슈베르트가 죽기 2년 전인 29세 때에 완성된 이 곡은 모두 4악장으로 되어있는데 모든 악장이 단조로 쓰여 있어 어둡고도 슬픈 분위기가 전곡에 흐릅니다. 일반적으로 2악장이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지만 곡이 시작되면서 곧장 어둡고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내어 뿜는 강렬한 1악장도 아주 좋습니다.

이 곡을 쓴 직후에 슈베르트가 친구 레오폴트 쿠펠바이저(슈베르트의 유명한 초상화를 그렸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의 절망적인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이라네. 건강이 회복될 기미는 안 보이네. 빛나던 희망도 없어지고 사랑과 우정으로 가득했던 행복이 고통으로 바뀌고 있다네.”

BUSCH QUARTET의 연주
멜로스 사중주단의 연주, 알반베르크 사중주단의 연주 등이 모두 좋지만 화요음악회에서는 비록 모노 녹음이지만 불후의 명연주로 손꼽히는 BUSCH QUARTET의 연주로 들었습니다(1936년 녹음).

음악 감상을 마치고 본 하나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 1절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그렇습니다. 슈베르트의 땅 위에서의 삶은 짧고 고통스러웠지만 그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는 줄 확신하였더라면 그렇게 슬픔 속에 살지 않아도 되지 않았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무너질 이 땅에서의 장막 집을 의지하지 말고 하늘에 있는 집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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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서울 문리대 영문학과를 졸업, 사업을 하다가 1985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20년간 키위교회 오클랜드 크리스천 어셈블리 장로로 섬기며 교민과 키위의 교량 역할을 했다. 2012년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클래식음악 감상회를 열어 교민들에게 음악을 통한 만남의 장을 열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