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했을 때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행복의 첫째 조건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도 이 말에 반기를 들지 못할 것이다.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말은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지 분명히 안다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일 것이다.
성경에는 여호와를 피하여 달아나는 선지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요나는 죄악에 빠진 니느웨성에 가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말았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듯 그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인생 파도의 격랑을 만나게 되고, 함께 배에 탔던 다른 사람들까지 죽음으로 모는 인생의 좌절과 불행을 맛보게 된다.
성경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탕자 이야기에서도 자신의 몫을 챙겨 집을 나간 아들은 집을 나간 후 자유를 만끽하는 것 같았지만 고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깨달은 사실은 자신이 있을 곳은 아버지의 품이라는 진리였다. 집을 나간 아들,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찰스 젠킨스(Charles Jenkins)의 이야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다. 젠킨스는 한국의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미군병사로서 늘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1965년 당시 월남전에 차출될 것을 두려워한 그가 선택한 것은 월북이었다. 북쪽에서 대우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철책을 넘었지만 그는 북에서 주체사상에 물든 공산주의로 세뇌되어 간첩들을 위한 영어교사로 살게 된다. 다행히도 납치되어온 한 일본여성과 결혼한 인연으로 일본정부의 송환교섭 끝에 그는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의 출국을 허락받았다.
한국의 최전방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간 40년 후 이제 65세의 노인이 된 그가 다시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복귀 신고하는 모습은 당시 세계적 뉴스가 되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 군사재판을 받는 대신 탈영 죄로 오키나와에서 한 달을 복역하고 미군에서 정식 제대하는 특혜를 받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안고 ‘아들이 이제 돌아 왔습니다’ 하며 울부짖었지만 남는 것은 지난 세월의 후회뿐이었다.
이런 심리상태는 사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내 자리를 떠나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며 달아나던 요나처럼 말이다. 풍랑을 맞아 죽음 직전까지 내려갔지만 물고기 뱃속일지언정 살아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고, 집을 나간 아들은 탕자의 신세가 되었지만 나에겐 돌아갈 아버지 집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잃었던 행복을 다시 맛볼 수 있었다.
중국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19)의 전염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대유행(Pandemic)을 선포하고 많은 나라가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며 방역에 온 힘을 쏟고 있지만 그 피해는 상상할 수 없는 인류의 대재앙으로 기록될 것 같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가 최고의 화두로 등장했다. 지역봉쇄, 이동제한, 이웃과의 단절, 집회금지 등, 사람사이의 접촉을 막는 것이 바이러스 확산방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지만, 평생 처음 겪어보는 경험에 당황할 수밖에 없고 심함 고독과 공포감마저 느끼게 한다. 주일예배마저도 각 가정에서 영상으로 드려야 하고 있어야 할 예배당의 자리에 있지 못하는 허탈감은 불행일 수밖에 없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관계의 단절은 모두를 슬프게 하고 더욱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더욱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하겠고 주님 곁에 나의 위치를 잡아야 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빨리 이 재앙이 물러가고 사랑하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다시 행복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행복하다’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는 말이다. 내가 지금 행복한가 아니면 불행한가 하는 것은,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지에 달린 것이다. 참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면 행복해 진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그러므로 행복의 자격은 사랑함에 있다.
내가 은퇴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교우들과 나의 이웃들은 왜 복잡한 한국으로 돌아가려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에겐 사랑하는 딸이 있기에 갈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행복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행복을 만드는 사랑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랑하느냐 이다.
사랑은 용서로부터 출발하며 또한 사랑에는 위로가 있어야 한다. 용서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일 뿐이며 용서 없는 사랑은 뿌리 없는 사랑으로 전략해 버리고 만다. 위로는 상대를 위한 배려요 용납이며 더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부부사랑은 서로를 위로할 때 더욱 돈독해 지고 쌓인 갈등은 녹아내린다. 아내에게 주는 남편의 위로의 말 한마디에 아내는 행복을 되찾고, 남편에게 주는 아내의 위로의 한 마디에 남편은 감격하고 힘을 얻는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목사님’하고 한번 불러주기만 해도 크게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아이들이 특별한 인사를 하지 못해도 ‘부르는 것이 인사야’ 라고 하시던 우리들 부모님 세대의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어머님’하고 부르기만 해도 시어머니의 마음을 녹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한번 불러도 달라지지 않으면 두 번 세 번 불러보라. 거기에 위로가 있고 그 위로가 사랑임을 알게 되고 그로부터 행복은 싹트게 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랑은 인내를 요구한다. 성경은 사랑의 정의를, ‘사랑은 오래참고’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뉴질랜드를 지상에 남은 유일한 낙원이라고 생각하며 이민 오는 사람들이 역경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거나 실망해서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뉴질랜드는 살아갈수록 좋은 나라인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민은 인내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삶이다. 모두가 행복한 이민가족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행복은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식어졌다면 가장 좋은 해법은 둘이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느낌 그 감정을 되살린다면 누구나 아름다운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신앙이 식어진다면 내가 처음 주님을 만나던 그 때를 기억하고 그 사랑을 되찾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보다는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했으면 좋겠다. 사랑하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혹시 나는 사랑받기만 원했던 목회자가 아니었을까 하며 그 날들을 되돌아본다. 지금이라도 더 사랑하고 더 축복하고 싶다.